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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2. 2019

여행 후의 변화들

에필로그_고독한 여정이 가져다준 뜻밖의 현상들

우붓에서 바라본 아궁화산, 발리, 인도네시아




끝은 새로운 시작의 다른 말이다


모든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서울에서 뜻밖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 진폭이 여느 때와 달랐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않은 극도의 역동성이 내 안에서 진동했다. 연일 열기가 차 올랐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신기한 현상에 스스로도 어리둥절했다. 그 첫 사건은 귀가 직후 찾아왔다. 이전까지는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여독부터 풀기에 바빴다. 묵은 빨래 정도만 꺼내 놓고 나머지 짐은 사나흘쯤 지나서 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장을 풀어 여행 물품 전체를 깨끗이 원위치시켰다. 마치 내 안에서 누군가가 조종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곧이어 의미심장한 상징이 깃든 사물과 사건이 일상 속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자립, 독립, 주체성, 능동성, 상승, 창조성 등 존재의 도약을 자극하는 상징들.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러한 상황이 너무 빈번하게 발생하는 데다가 상징들의 방향마저 한길로 흐르고 있어서 고개를 갸우뚱하길 반복했다. 


이후 방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내 방은 그 크기에 비해 소장물이 월등히 많았다. 온갖 사물들로 빽빽한 상태. 공간 대비 적정 수납량을 초과한 지 오래였다. 정리를 하려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아 가끔 눈에 보이는 것만 치우다가 1년에 한두 번쯤 대청소를 하면서 방의 상태를 원상태로 근근이 되돌리곤 했다. 대대적인 정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리 보아도 엄두가 나지 않아 현상 유지만 간신히 하며 살아왔다.  


그랬던 방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내면세계와 긴밀히 연동되는 주변 환경을 이번 기회를 빌려 재조직하려는 것이었다. 융 심리학이 이야기하는 ‘나만의 신전 꾸미기’의 과정이었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나에게 지령을 내리고 내가 그것을 수행하는 양상. 마음이 내린 명령을 몸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이행하는 광경이 신비로웠다. 정돈해야 할 양이 워낙 방대해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나눠서 작업을 했다. 하루 기준 한두 시간, 일주일에 두세 번, 여러 주에 걸쳐 정리 작업을 벌였다. 내 세계가 조금씩 질서를 찾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기분이 아주 개운했다. 낡은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글 작업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그 최초의 결과물이 바로 이 연재물이다. 작정하고 작업했다기보다는 흐름에 순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작업을 시작하고 전개했다. 창작의 열망, 표현의 의지가 내 안에서 계속해서 일렁이고 있었다. 어디에 어떻게 기고할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완성도도 중요하지 않았다. 투박하게라도 하고 싶은 말을 뱉어내면 그걸로 족했다. 일단 쓰고 보자는 심산으로 마음속의 말들을 뱉어냈다. 괜한 자기 검열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타인의 평가는 신경 쓰지 말고 지금의 나를 최대한 표현해 보자고 생각하며 작업을 밀어붙였다.  


작업의 속도는 매서웠다. 강력한 어떤 힘이 나를 강력히 끌고 나가는 기분. 창조성이 피어난 것이었다. 이십몇 년 만에 찾아왔다는 극강의 더위로 세상이 후끈 달아오른 시점이었다. 내 방은 여느 방들에 비해 훨씬 더웠다. 커다란 선풍기를 최고 풍량으로 틀어 놓아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방에서 미니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매일 같이 글을 썼다. 날마다 폭염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더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파죽지세로 글을 써 나가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작심하고 밀어붙인다고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 예전 같았으면 이건 명백히 안 되는 일이었다. 폭염의 정점에서 작업에 마침표를 찍었다. 기상 관측을 한 지난 110년을 통틀어 서울의 수은주가 최고점을 기록한 날이었다.


헤아려 보니 첫 문장을 적은 지 3주 만이었다. 개인사의 처리에 할애한 중간중간의 며칠을 제외하면 작업에 들인 실제 기간은 약 보름. 그 짧은 기간에 단행본 한 권 분량을 써냈다. 평소의 집필 속도는 이보다 훨씬 느린 편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같은 분량을 집필하는데 최소 석 달은 필요한 상황. 그런데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신기했다.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나자 다시 창작욕이 밀려왔다. 폭염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황. 이번에는 다른 글의 초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글에 앞서 연재한 <나는 숲이다>였다. 작업에 소요된 기간은 총 12일. 원고량은 이 연재글인 <반년 동안의 고독>보다 더 많았다.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반년 간의 여정 속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닫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자기실현과 관련해 그쪽 계통에서 상당히 신뢰받는 서적들이 내 안에서 벌어진 작용들을 설명했다. 고독의 여정 속에서 내면이 재정비되면서 창조성이 고조되었음을 책 속의 내용들을 통해 실감했다. 책이 권하는 여러 가지 기법들 역시 형식만 달랐을 뿐 내가 지난 반년 간 벌인 시도들과 거의 유사한 원리를 취하고 있었다. 창조성 회복을 위한 아주 중요한 도구라는 아침 글쓰기는 방향성이나 전개 방식 면에서 내 자동기술법 글쓰기와 거의 흡사하기까지 했다. 스스로에 대한 다독임, 욕망을 현실로 옮기려는 노력, 신체 활용의 기회 마련에 이르기까지 여행에서 벌인 그 밖의 시도들에 대해서도 유사점을 꽤 많이 찾아냈다. 그동안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현실로 옮겼을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자기실현이 가속화되었다.  


상승과 하강을 극적으로 반복한 여행이었다. 그 진폭이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재확립하는 과정이었으니 부침의 반복은 당연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에는 영문도 모르고 괴로워했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현상을 겪어야 했을 뿐이다. 보폭의 너비만큼 강한 저항이 일어나는 게 당연했다. 실망스러운 나 자신의 모습에 자주 좌절했고, 그로 인해 불안과 공포에 짓눌리며 하강을 거듭했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내 안 어딘가에서는 발전적인 현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귀국은 내면세계의 재정립을 위해 퍼즐 맞추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예열의 과정이었던 제주에서의 시간을 거쳐 서울에 입성한 후 내면세계의 조각 모음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련의 사건들이 그러한 현상을 외적으로 드러냈다. 내 안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면서 자리를 이탈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러한 과정을 몸소 체험하면서 자기회복, 더 나아가 자기실현의 원리에 대한 깨달음도 찾아왔다. 전문지식과 대비하는 과정에서 전체 원리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졌다. 이후 심리학과 예술을 접목한 작업으로 타인의 내면 강화를 여러 차례 도왔다. 결과는 모두 좋았다. 


이후에도 의욕은 계속 솟구쳤다. 그렇지만 쌓아 올리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기는 쉬운 법. 잠시 방심했다가 삽시간에 균형이 무너지는 경험을 몇 차례 하면서 꾸준한 자기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깨달았다. 내면의 상태를 상시로 점검하지 않으면 시동은 금세 꺼진다는 사실을 지금도 자주 곱씹는다. 여행과 그 후속 과정 모두가 귀중한 경험이었지만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번에는 또 어떤 경험 속으로 뛰어들지를 고민하고 있다.




# 연재를 마무리하며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 여행이었다. 조용한 곳에서 작업이나 하고 오겠다고 나선 발걸음이 나 자신과의 직면을 통해 내면세계를 재조직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인식과 경험의 통합이 필요한 시점이었던 것 같다. 전체적인 자기실현 과정을 인과성에 맞춰 일목요연하게 구성했다면 좋겠지만 여행 속의 각성과 시도들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온 데다가 경험한 국면을 중심으로 기록하다 보니 글의 전개가 어수선하다. 심리학적 원리의 설명보다 하고 싶은 말을 적고 게시하는 행위 자체가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과제이기도 했다. 직업인으로서 글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싶은 욕망과 자연인으로서 완벽주의의 강박을 깨뜨리고자 하는 의지도 서로 대립했는데 여행에서의 깨달음에 의거해 후자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소 산만한 글을 현명한 독자들이 지혜롭게 소화해 주리라 믿는다. 여행 기간은 반년이지만 그 경험을 글로 쓰고 연재하기까지 계속해서 고독 속에서 살았다. 긴 시간을 견뎌왔으니 연재를 마무리하는 지금을 기점으로 고독에서 빠져나가 볼까 한다. 여행과 관련한 보편적인 화두를 글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 조만간 작업을 시작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여행을 통해 삶을 키워 나가고자 하는 이들과 계속해서 소통할 수 있었으면 한다. 끝으로 읽어주신 분들 모두에게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한다. 계속해서 성장하고 도약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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