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영진 May 31. 2019

6. 여행을 직시할 것

우붓 6_여행을 지혜의 보고로 활용하기 위한 전제 조건

몽키 포레스트, 우붓, 발리, 인도네시아




여행은 때때로 합리성을 마비시킨다


원숭이에게 습격을 당했다. 우붓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인 몽키 포레스트를 관람하는 중이었다. 그 이름이 설명하듯 울창한 숲 지대 곳곳에서 원숭이가 출몰했는데 방문객의 대열을 따라 걷는 사이 탐방로 주변에 앉아 있던 원숭이 한 마리가 내 등을 공격했다. 백팩의 옆 주머니에 꽂아둔 생수병을 빼내려는 수작이었는데 그 기세와 움직임이 아주 날카롭고 거칠었다. 재롱 많은 동물로만 기억하고 있던 원숭이가 실제로는 무시 못할 공격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순간 깨달았다. 찰나였음에도 소름이 잔뜩 끼쳐왔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에는 여러 마리의 원숭이가 폭력을 동반한 방식으로 작고 왜소한 새끼 원숭이 하나를 괴롭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동물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음에도 그 상황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유전자 구조의 유사성 때문인지 감정을 배출하는 형식이 사람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온갖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 세계의 풍경이 그 위로 비쳤다.


원숭이 한 마리가 코코넛을 나무 데크에 반복해서 때려 외피를 쪼개는 모습도 마주쳤다. 인간 이외의 또 다른 영장류가 도구를 사용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의지를 불태우며 코코넛 쪼개기에 몰입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선사 시대의 인류를 연상시켰다. 새끼 원숭이를 복부에 매달고 열심히 돌아다니는 어미 원숭이의 모습에서는 종의 문제를 뛰어넘는 모성애를 엿봤다. 그 밖의 장면들에서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예전 같았으면 원숭이에게 공격을 당해도 다른 영장류와 인간 사이의 유사성은 되짚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덩치 큰 원숭이들이 새끼 원숭이에게 공격을 퍼붓는 상황을 두고도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로만 여겼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대자연의 섭리가 궁금하다며 일부러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기도 하면서 정작 자연의 진풍경이 바로 앞에서 펼쳐질 때는 말초적인 부분이나 더듬다가 뒤로 치우던 여행자가 과거의 나였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꽤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여행을 했다. 성찰의 노력이 없지는 않았으나 여행이 펼쳐 보이는 비현실적인 장면들에 압도당해 판단력이 마비될 때가 많았다. 당시의 나에게는 성찰보다 자극적인 경험이 더 중요했다. 즐겁자고 벌인 내 행동이 현지의 문화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눈에 띄는 문제만 드러나지 않으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행의 장면에서 결정적인 시사점을 발췌하는 일 따위에도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 밖의 일들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헤아리지 않고 기분대로 행동할 때가 많았다. 개인적인 편의를 우선시하며 여행하다 보니 성찰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새로운 인식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앞에 두고도 오히려 시선을 다른 각도로 돌려 지인들에게 자랑할 사연만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여행 그 자체에 대한 접근도 마찬가지였다. 힘겨운 사회생활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감행한 초기 여행들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도피 심리가 작동해 떠나온 여행임에도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를 부여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도전이니 희망이니 자신감이니 하는 낱말을 동원하면서 환골탈태라도 하고 온 것마냥 떠벌렸다. 그러고도 내가 그러고 있는 줄 몰랐다. 성찰하지 않은 탓이었다. 이따금 그럴싸하게 내뱉은 여행의 깨달음은 후에 보면 타인의 시각이나 깨달음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결과에 불과했다. 때로는 여행을 자랑하기 위해, 또 때로는 무지와 미성숙을 감추기 위해 여행의 명분을 급조하고, 길 위에서의 사연을 화려하게 포장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걸 또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그렇게 행동하던 시절이었다. 여행의 세계에서 성찰의 문제를 언급하는 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합리성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나르시시즘이 차지하고 앉아 주인 노릇을 했다. 저마다 스스로에게 심취하기에 바빴다. 개인적인 여행 경험을 보편적인 현상인 것처럼 떠들고 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주관적인 경험을 앞세워 그 나라의 국민성을 일반화해도 의문 어린 시선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먼저 여행한 사람의 경험이 진실이었다. 많이 여행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진리나 마찬가지였다. 성찰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오히려 일상에서는 합리적인 태도를 보이던 사람조차 여행에서는 감정에 취하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엉뚱한 논리를 만들어 내는 일이 빈번했다. 


섣부른 일반화가 여행에서 의외로 많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점은 해외여행을 한 지 10년쯤이 지났을 무렵. 주관적인 여행 경험을 아무런 검증 없이 일반화해 주변에 유포하는 이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돌아 보니 나 또한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물이나 사건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형국. 아차 싶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사물과 현상을 똑바로 응시하고자 애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은 합리성을 흔드는 쪽으로 기능했던 여행이 역설적이게도 균형 잡힌 사고를 연습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시공간으로 변모했다. 일상에서 나를 옥죄고 있던 통념과 관습에서 놓여 난 여행 특유의 환경 때문인지 내 앞에 펼쳐지는 상황들, 내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에 집중하기가 오히려 수월했다. 여행이 펼쳐보이는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인해 감정의 파고는 변함없이 높았고, 나를 덮쳐오는 사건의 흐름도 예와 다름없이 변화무쌍했지만 거친 파도가 숙련된 항해사를 키우듯 여행이 선사하는 학습 효과도 그만큼 컸다. 


몇몇 탐구 과제를 안고 떠나온 이번 여행에서는 합리적인 자세가 더더욱 크게 요구되고 있었다. 이국의 환경이 창작 활동의 효율을 높여 주는지, 해외에서의 장기 체류를 통해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는지, 낯선 환경이 내면의 활성화를 돕는 쪽으로 기능하는지, 창조적인 생활의 기본 원리는 무엇인지 등을 두루 살피려면 감식안을 전보다 더 날카롭게 벼려야 했다. 우붓 생활의 초기부터 현지의 일상과 여행의 세부 국면들을 최대한 세밀하게 더듬고 있는 이유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한 몽키 포레스트에서 나도 모르게 원숭이의 생태를 살피게 된 까닭이기도 했다.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길. 주차장을 빠져나와 한적한 길목에 스쿠터를 세워 두고 땀을 식히고 있는데 길 건너편에서 거북이걸음으로 걷는 서양 커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만히 보니 남자는 목에 보호대를 한 상태였다. 팔에도 깁스를 했는데 다리마저 불편한지 여자 친구의 부축을 받아 어렵사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유사한 사례를 이미 여러 번 목격했기에 그가 여행의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무절제하게 스쿠터를 몰다가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계획한 일정을 얼마간 포기하고 건강 회복에 주력해야 하는 그와 소중한 여행 기회를 간병에 쏟아부어야 하는 그의 여자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10여 분의 휴식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할 시간. 안전 운행을 다짐하며 스쿠터에 시동을 걸었다.




# 성찰은 생산적인 여행을 유도한다

합리성의 문제는 여행과 관련해 내가 수 년째 주목하고 있는 화두다. 그간 관찰한 바에 의하면 현대의 여행 문화는 여행을 지혜의 보고로 묘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행에서의 성찰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주로 관광 산업이 그러한 경향을 유도한다. 여행을 할 때만이라도 생각을 멈추고 마음껏 즐기라고 권유하는 식이다. 관광 산업의 입장에서는 그래야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비우고 정화하는 행위는 여행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생각을 멈출 필요도 있다. 하지만 불필요한 고민을 멈추고 낯선 풍경이 선사하는 자극을 만끽하라는 것이지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비움과 채움 간의 적절한 완급 조절을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이유를 깨달으면 확신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듯 여행의 원리를 이해하면 생산적인 방향으로 여정을 꾸릴 수 있다.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요소는 사물과 사건에 대해 바른 해석을 도모해주는 합리성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5. 주 5일제 여행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