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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Jul 20. 2019

8. 디지털 노마드가 뭐길래

우붓 8_프리랜서와 디지털 노마드의 경계에서

공동체 문화를 기반으로 해 운영되는 지역 식당의 장식물, 우붓, 발리, 인도네시아 




주도 세력을 살피면 문화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


이번 여행의 또 다른 탐구 과제 중 하나는 근로 방식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는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였다. 작업을 하려고 오른 여행길이어서 탐색을 하기에 적기였다. 세계 각국의 디지털 노마드가 직무 수행을 위해 모여든다는 협업 공간을 직접 사용하면서 문화의 구조와 방향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이들도 접촉해 저마다의 생활상과 그들이 이야기하는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의 비전을 들어볼 요량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관련 정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는 알려진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인터넷을 뒤져 보니 국내에도 자신을 디지털 노마드라고 칭하며 자부심을 드러내는 이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많았다. 디지털 노마드 체험기에 부러움이 담긴 댓글이 달리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디지털 노마드가 될 수 있는지 묻는 질문도 올라왔다.  


유익한 요소가 많다면 디지털 노마드로 변신할 계획을 품고 있었다. 10년 이상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니 사실상 디지털 노마드와 생활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디지털 노마드의 정체성을 부여하려면 그게 뭔지부터 알아야 했다. 우붓 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디지털 노마드 문화의 면면을 신중하게 탐색해 나갔다. 정체성의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는지라 꽤 집요하게 응시했다.  


직접 경험해 보니 디지털 노마드 문화는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 근로 방식에 혁신을 가져다주는 요소도 꽤 있었고, 사회의 변혁을 추동할 만한 가치 체계도 보였다. 저변 확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논리도 꽤 촘촘했다. 빈틈이 없지는 않았지만 보편적인 수준에서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각박한 현실에 지친 이들에게는 희망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렇지만 2~3주의 체험만으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일. 전체적인 구조를 조망하려면 좀 더 경험하는 게 좋겠다 싶어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문화적 특징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그러던 중 뜻밖의 순간을 맞닥뜨렸다. 디지털 노마드 문화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어느 날엔가 저녁 작업을 위해 협업 공간에 나갔는데 라운지와 마당 공간에서 대규모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멤버십을 등록한 두 곳 중 하나였다. 무슨 행사인지 스탭에게 물어보니 디지털 노마드를 대상으로 한 국제 행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계 각국의 디지털 노마드가 모인 자리인 데다가 그 열기가 눈길을 잡아 끌 정도로 뜨거워 작업을 잠시 미루고 얼마간 행사를 구경했다. 그 과정에서 묘한 경향을 발견했다.  


가만히 보니 참가자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모습이었다. 구심점만 다를 뿐 거의 종교 집회를 방불케 했다. 마술피리를 따라 정신없이 걷는 행렬과 상당히 닮은 느낌이랄까. 주최 측이 마련한 프로그램 속에서 모두가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위기에 상당히 압도당한 모양새였다. 그 대목에서 깨달았다.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이 과열된 현상의 배후에는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에 대한 환상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날 이후 디지털 노마드 문화의 본질이 좀 더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니 디지털 노마드 문화를 끌고 가는 주체는 글로벌 시장의 주도 세력인 IT 산업이었다. 초국적 기업이나 스타트업이 고정비 절감의 일환으로 원격 업무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디지털 노마드'라는 신조어를 만들고, 그것을 기존의 원격 작업 환경 위에 덧씌운 것이 바로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였다. 이미 존재하던 것을 조금 더 세련된 모양으로 다듬어 프레임화함으로써 디지털 노마드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또한 디지털 노마드 문화를 주도하는 국가는 미국, 호주 등 신자유주의를 선도하는 초강력 자본주의 국가들이었다. 새로운 세기가 열린 듯 많은 이들이 흥분하고 있었지만 디지털 노마드 문화는 라이프 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신상품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협업 공간이며, 숙소며, 음식 문화며, 여가 활동이며, 더 크게는 항공과 개인에게 요구되는 이동식 생활 장비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라는 영토 위에 놓인 많은 것들은 유관 산업이나 관계자들에게 이익 창출을 도모해 주는 상품이었다.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미디어에서 디지털 노마드 문화의 장점이나 비전을 설명한 컨텐츠가 끊임없이 유통되고 있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러한 컨텐츠를 생산하는 자들 또한 디지털 노마드 문화의 저변 확대를 통해 이윤을 취득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디지털 노마드 세계에는 소외 현상도 만연해 있었다. 관계 향상이나 인간성 보호를 위한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지만 일부 스타트업이 온라인 업무 체계에서 비롯된 단절 현상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기 위해 내부 직원들에 한해 벌이는 일이었다. 각자도생하는 디지털 노마드들이 모여 있는 현장 상황은 그와 많이 달랐다. 


이따금 디지털 노마드와 친분을 맺으려고 시도했으나 시원스러운 결과를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대다수가 겉으로만 친절할 뿐 냉랭한 뒷모습을 보이곤 했다. 협업 공간에서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때때로 가벼운 외부 활동을 제안해 보기도 했지만 친밀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안면을 트는 수준 이상을 넘기기는 쉽지 않았다. 차가운 표정들 너머로 외로움이 자주 비침에도 다들 그냥 견디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기분 좋은 인연을 기대하며 협업 공간 측에서 개최한 신입 멤버 오리엔테이션 참여해 보기도 했다. 공간 안내와 지역 정보를 제공받고, 서로 안면을 익힐 기회를 얻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후 얼굴을 자주 마주치면서도 관계는 더 이상 깊어지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서로가 그랬다. 삶의 질 향상을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삼는 디지털 노마드의 세계에서 삶의 질의 바탕인 인간관계 형성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수년간 디지털 노마드 생활을 했다는 이들에게 그동안의 경험을 물어보기도 했다. 역시나 진솔한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상 디지털 노마드 세계의 환경은 서로가 서로를 원하면서도 가까워질 수 없는 쪽에 가까웠다. 협업 공간에서 다양한 주제와 형식으로 계속해서 이벤트를 벌이는지라 관계의 폭을 넓히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그렇게 해서 맺은 관계들 대부분은 형식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격적으로 두텁게 친분을 키운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여행이 선사하는 낭만 때문인지 겉으로 드러나는 풍경의 질감은 비교적 부드러웠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는 차갑고 살벌한 사무 환경을 여행지라는 제3의 지대에 옮겨놓은 것에 불과했다. 디지털 노마드의 세계에서는 상대가 자신에게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했다. 이익을 제공하면 전략적 차원에서 친분을 유지하고, 그렇지 않다면 적당히 회피하면 그만인 것이다. 오고 가는 대화들 역시 사람의 존재는 온데간데없고 돈 얘기만 한가득이었다. 그러는 사이 각자의 외로움은 더욱더 깊어 갔다. 활력 넘치는 일상이 묘사된 인터넷 글과는 그 상황이 많이 달랐다.  


이번 여행 중에 경험한 어느 협업 공간은 신입 회원 오리엔테이션을 공간 홍보의 기회로 활용하기도 했다. 공간의 시장 가치며, 시설에 투입한 노력과 비용, 국제적 인지도 등을 도표로 만들어 신입 멤버들에게 보여주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공간의 충성 멤버가 돼 전도사 역할을 자발적으로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다단계 기업의 사업 설명회에 참석한 듯한 기분이 들었음은 물론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도표를 이용해 창업자의 이력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대목에서는 더 큰 의구심이 밀려왔다. 창업자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내가 왜 알아야 하는지 의아했지만 선망의 눈빛으로 도표를 훑어내리는 다른 신입 회원들을 앞에 두고 딴지를 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을 부속 시설의 매출을 올리는 기회로 이용하는 것도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협업 공간들은 예외 없이 시설 내부에 음식과 음료를 만들어 파는 카페를 갖추고 있었다. 외부로 나가지 않고도 식사나 커피를 해결할 수 있으니 공간 사용자 중 누군가에게는 유용한 시설이겠지만 오리엔테이션을 식사 시간과 겹치는 시각에 배치하고, 행사 시작과 함께 메뉴판부터 돌리는 모습에서 모종의 장삿속이 들여다 보였다. 겉으로는 환영을 표하면서 속으로는 신입 멤버를 이윤 창출의 도구로 여기는 듯했다. 디지털 노마드 세계의 작동 원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오리엔테이션의 현장에서 고개를 자주 갸웃거려야 했다. 사실상 협업 공간은 시장경제에 친화된 부동산 상품이었다. 나다운 삶을 꿈꾸며 답답한 환경을 박차고 나온 이들이 도달한 곳은 자본주의의 또 다른 지붕 밑이었다. 


더 이상 고민할 것 없이 프리랜서라는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겉으로만 보면 내 생활상은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공간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전부터 취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행의 환상과 싸우며 합리성을 강화해 나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막연한 기대와 상상으로 마음을 부풀리는 대신 현실을 직시하며 사물과 현상의 의미를 해독하는 일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여행의 주요 과제 하나를 조기에 해결했으니 이제 남은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차례였다.




# 디지털 노마드 문화에 대한 소견

개인적으로는 디지털 노마드로의 변신을 유보했지만 열정을 다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 대한민국 디지털 노마드를 응원한다. 유익한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에 디지털 노마드 문화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여부에도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일 예정이다. 디지털 기술을 돈벌이로 활용하려는 움직임과 인류 성장의 해법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주목할 생각이다. 국내 디지털 노마드 문화가 아직까지 선진국을 따라가는 입장에 놓여 있다지만 현장에서 만난 선진국 출신의 디지털 노마드 역시 이렇다 할 선도적 비전이나 철학은 없는 듯 보였다. 세계 최강의 IT 인프라를 갖췄고, 사회적 역동성도 손색이 없는 한국이니 만큼 조금만 더 노력을 기울이면 문화 선도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자면 '여행하면서 먹고사는 노하우'에 집중된 시선을 사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나 삶의 질 향상 같은 가치 지향적 문제로 확대해야 할 것이다. 지면의 한계상 조목조목 적기는 어렵지만 그럴 만한 잠재력이 우리에게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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