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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Aug 11. 2019

11. 인연의 숨은 역할을 주목할 것

짱구 2_난데없이 닥쳐온 그는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바투 볼롱 비치, 짱구, 발리, 인도네시아




어떤 인연은 인도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붓 5인방 중 한 명인 안토니가 짐을 몽땅 싸 들고 내가 머무는 숙소로 왔다. 내가 기거하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우붓에서 지낼 당시 5인방은 나보다 먼저 우붓 일정을 마무리하고 하나둘씩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그 목적지는 내가 차기 체류 지역으로 계획해 둔 짱구였다. 스페인 여행자 안토니도, 말레이시아 여행자 이케안도, 스웨덴 여행자 요아킴도, 프랑스 여행자 수미야도 시차를 달리해 짱구로 떠났다. 그러고서 얼마 후, 내 차례가 다가왔다.  


짱구 도착 당일, 안토니와 연락이 닿았다. 아직도 짱구에 있다는 전갈. 요아킴도 같이 있다는 소식이었다. 각기 다른 일자에 짱구로 떠났는데 현지에서 만난 모양이었다. 그들이 체류 중인 구역은 내가 묵는 구역에서 꽤 멀었다. 같은 지역으로 분류되지만 도보로 1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거리. 스쿠터를 렌탈한 김에 동네 분위기도 확인할 겸 오랜만에 그들도 볼 겸 스쿠터에 시동을 걸었다.  


그들이 머무는 숙소는 꽤 외진 곳에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널찍한 마당 한가운데에 수영장이 설치된 큼직한 2층짜리 풀빌라가 시원스럽게 펼쳐졌다. 현지에서 만난 여행자들을 불러 모아 날마다 파티를 벌이고 있다고 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거실에는 10여 명의 여행자들이 모여 있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나를 향해 환대의 마음을 격하게 쏟아낸 요아킴이 내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안토니표 토마토 스파게티를 접시에 잔뜩 담아 내주었다. 곧이어 다른 이들을 향해 나를 소개했다. 우붓에서 진행했던 ‘I am a forest’ 프로젝트도 큰 소리로 설명했는데 작업에 참여하게 돼 뿌듯한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안토니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기에 수영장 곁에 놓인 비치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 요아킴이 커피를 내려서 가져다주었는데 커피잔을 건네는 표정이 우붓에서 함께 지낼 때보다 훨씬 더 다정했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모습에서 극진한 마음이 느껴졌다. 무거운 얼굴로 대화를 청한 안토니의 이야기는 의외로 소소했다. 짱구에서 그동안 느낀 감정을 가볍게 토로하는 수준이었는데 대화의 내용보다는 자신의 심정을 나에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듯 보였다. 나를 멘토 격의 인물로 여기는 듯했다. 


그가 나를 이정표 같은 인물로 여긴다는 사실은 우붓에서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5인방의 손에 이끌려 현지 선술집을 찾은 날이었다. 다음날 일정을 고려해 5인방보다 먼저 숙소로 돌아온 내 뒤를 이어 말레이시아 여행자 이케안이 한 시간 차를 두고 복귀했는데 그가 대뜸 나를 붙잡고 안토니 이야기를 했다. 선술집에서 안토니와 대화를 나눴는데 나를 특별한 인물로 묘사하더란다. "발리에 오기 직전 워킹홀리데이로 머물렀던 뉴질랜드에서의 1년보다 영진과 보낸 오늘 하루에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고 하더라는 것. 굉장히 진지하고 솔직한 표정이었다고 했다. 안토니와 하루를 함께하긴 했지만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를 뒷좌석에 싣고 스쿠터를 운전한 게 다였다. 몇몇 볼거리를 함께 구경하고, 노점에서 음식도 나눠 먹으며 간간이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안토니가 교훈 삼을 만한 이야기를 한 기억은 없었다. 이케안에 이어 다음 날에는 요아킴도 같은 이야기를 나에게 전했다. 


그랬던 안토니가 다른 친구들과의 일정을 마무리한 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내가 머무는 숙소로 왔다. 언제 짱구를 떠날지는 미정이라는 설명.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러한 나날들이 계속되길 바랐으나 일부러 나를 찾아온 안토니를 바로 앞에 두고 내 일정만 고수할 수도 없어 일간 계획을 조금씩 조절해 얼마간의 시간을 안토니에게 할애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안토니는 자립적인 성향의 소유자였다.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부정적인 감정을 남에게 전가하는 일이 없었고, 대개는 겸손한 태도로 상대를 존중했다. 시종일관 명랑한 화법으로 하루에 몇 번씩 촌철살인의 유머를 터뜨렸으며, 약속도 아주 잘 지켰다. 


안토니의 입실로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내 여행의 목적을 이미 안토니가 알고 있는지라 평일 낮에는 양해를 구하고 협업 공간에서 작업을 했다. 대신 협업 공간으로 나서는 시간을 약간 늦춰 오전에 같이 장을 보거나 저녁 시간에 잠시 숙소로 복귀해 함께 저녁을 해 먹었다. 어떤 날은 내가 요리를 했고, 어떤 날은 안토니가 했다. 바쁜 계획이 없는 날의 안토니가 근사한 저녁 식사를 만들어 놓고 나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주 5일제 여행의 휴일에는 짱구 중심가의 이색 공간들을 함께 탐방하거나 휴양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다른 지역으로 원정을 떠났다. 발리 휴양의 대표적 명소들인 스미냑 해변, 쿠타 해변 등을 돌며 발리의 또 다른 풍경들을 탐험했다. 


그러는 사이 안토니가 떠날 날이 다가왔다. 미식가인 안토니가 맛있는 음식에 관심이 많아 이별 전야에 멋진 식당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약속해 둔 상황. 저녁이 되어 안토니와 함께 지역 맛집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가 고른 메뉴는 그 식당에서 가장 비싼 스테이크와 열대 과일 여러 개를 갈아 만든 스무디. 훌륭한 식감을 선사하는 스테이크와 건강의 맛이 가득한 스무디가 커다란 행복감을 선사했다. 계산은 수중의 현지 통화를 다 써야 하는 안토니가 했다. 그러고도 통화가 남았다며 근처의 옷 가게에서 티셔츠도 한 벌 샀다. 


2차는 내가 책임졌다. 목적지는 자타가 공인하는 지역 최고의 명소 데우스 카페. 워낙 유명한 곳이어서 언제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안토니도 아직 가보지 않았다기에 내부로 발을 들이밀었다. 겉에서 보기에는 마당 넓은 카페 정도로 보였던 데우스 카페는 안으로 들어가서 구석구석 살펴보니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구조도 오밀조밀했다. 바이크와 액세서리와 패션용품을 판매하는 바이크 샵을 중심으로 갤러리, 레스토랑, 바, 패션 상품을 판매하는 야외 부스, 콘서트 겸 클럽 무대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공간들이 내부에 잔뜩 숨어 있었다. 테마몰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곳곳을 어슬렁거리던 중 실력 좋은 밴드가 라이브 공연을 펼치고 있는 콘서트 홀에 발길이 닿았다. 출중한 드럼 비트 위에서 기타와 건반이 압도적인 솜씨로 그루브를 빚어내는 유려한 음악의 물결에 맞춰 장내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숙소로 돌아온 시각은 자정 무렵. 잠자리에 들기 전, 배낭 깊은 곳에 보관해 둔 크로키북을 꺼냈다. 여행 중에 여가 시간을 이용해 그림 연습을 하려고 한국에서 사 왔는데 나보다는 안토니에게 더 유용할 듯했다. 짱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안토니가 길을 잃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우붓에서는 심신의 상태가 아주 좋았는데 짱구에서 방향을 상실했다는 설명. 휴대성과 용도를 고려해 신중하게 고른 크로키북은 공산품의 질이 현저히 낮은 발리에서는 구하려야 구할 수 없는 물품이었지만 안토니 덕분에 즐거운 순간이 많았고, 나를 각별하게 여기는 줄도 아는 터라 안토니에게 선물로 건네면서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창의적인 기질이 상당함에도 그것을 현실로 옮기는 데 주저함이 많은 안토니였다. 크로키북을 손에 쥔 안토니의 표정이 별처럼 빛나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음날 아침, 짐 정리를 마친 안토니가 정열의 나라 스페인에서 온 여행자답게 진한 포옹으로 나에게 이별 인사를 건넸다. 한 번이면 족한 포옹을 그 자리에서 세 번이나 했다. 그동안 여행길 위에서 숱하게 포옹을 나눠 왔지만 한자리에서 세 번이나 작별 포옹을 당한 적은 처음이었다. 안토니의 감정은 그만큼 깊은 듯했다. 세 번째 포옹을 마친 안토니가 이윽고 배낭을 짊어졌다. 그러고는 드넓은 세상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 안토니와의 인연이 시사하는 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안토니는 나에게 특별한 역할을 했다. 충동에 입각한 행동, 타인에 대한 지나친 헌신,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낭만적인 태도, 자신의 욕망에 대한 예의 바른 호소 등 안토니가 보여준 여러 가지 모습은 이 시기의 내가 한 번쯤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었다. 안토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여행의 목적에 근거해 개인적으로 탐구의 노력을 기울였을 가능성이 높다. 안토니가 보여 준 일부 특징은 향후 범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또 다른 특징은 체득할 필요성을 느꼈다. 짱구에서 작별을 나눴던 안토니는 이후 다른 지역에서 다시 한 번 내 앞에 등장한다. 그때는 나에게 즐거움과 혼란을 동시에 안기는 존재로 기능한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안토니는 나에게 경험의 인도자 역할을 했던 셈이다. 그렇지만 안토니와의 관계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없다. 다만 특정 시점에서 그에 걸맞은 존재나 사건이 당도한다는 사실은 묵과하지 않는 게 좋겠다. 칼 융의 심리학 이론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동시성'이라고 표현한다. 동시적 현상 속에는 중요한 의미나 신호가 담겨 있다. 이를 정확하게 읽고 호응하는 게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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