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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Aug 19. 2019

15. 어떻게 살 것인가

짱구 6_삶의 향방을 고민하는 나날들

술루반 비치, 울루와투, 발리, 인도네시아




정체성은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준다


우붓에서 머무는 동안 일주일에 한두 번은 카메라를 들고 일대를 촬영하러 다녔다. 짱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안변에 자리한 짱구의 풍경은 농경지와 숲 지대로 이루어진 우붓과 또 달랐다. 어떤 날에는 해변을 돌아다니며 서퍼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았고, 어떤 날에는 뒷골목을 돌며 현지의 삶을 포착했다. 자연이 풍요로운 외곽으로 나가 가슴을 건드리는 장면을 향해 슈팅을 하기도 했다. 협업 공간을 드나드는 평일에도 가방에는 촬영 장비를 늘 지니고 다녔다. 대기 상태로 가방 속에 둘 때가 잦았지만 인상적인 장면을 마주할 때면 얼른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사진은 글 외에 내가 집중하는 또 하나의 예술 장르다. 글쓰기는 순수 창작과 상업적 영역을 적당히 오가고 있다면 사진은 순수 창작의 관점에 좀 더 치중한다. 이론적으로는 상업 작업과 순수 예술이 이분화된다고 단정 짓기 어렵지만 현실 속에서는 서로 괴리를 보이는 순간들이 많다. 때문에 글을 개인적으로 구분할 때 자신의 철학과 감성을 반영해 쓰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로 구분한다. 전자는 예술가의 마음가짐을 요구하고, 후자는 기술자의 태도를 요구한다.  


사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통은 상업적 활용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작업을 하는 편이다.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피사체나 장면을 만났을 때 셔터를 누른다. 나를 반영한 사진을 찍었을 때 희열을 느끼고, 전시회에서도 그런 사진들을 골라 전시한다. 그렇지만 이따금은 상업적 활용을 고려해 사진을 찍어야 할 때도 있다. 여행을 주제로 원고 청탁을 받았을 경우, 사진도 함께 제공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내 감성보다는 원고의 용도에 맞춰 사진을 찍는다. 전자가 순수 예술이라면 후자는 상업 사진이다. 당연히 전자가 훨씬 나답다. 


돌아보면 십 년 이상 사진을 찍었음에도 아무 생각 없이 셔터를 누를 때가 많았다. 숨을 쉬는 행위와 비슷했다. 내가 그러는 줄도 모른 채 행위를 한달까. 물론 카메라를 들면 집중력 있게 촬영에 임했지만 그 역시 다분히 습관적이었다. 생각 없는 사진, 감정 없는 사진을 무수히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부터 그러한 경향을 바로잡을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곧이어 의문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로 사진을 좋아하는가? 사진은 내 영혼을 달뜨게 하는가? 업으로 삼을 만큼의 화학작용이 사진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가? 이제껏 제대로 돌아본 적 없는 질문들이었다. 하여 이번 여행에서는 사진과 나 사이의 관계, 내 작업의 문제점 등을 두루 확인해 보기로 했다. 


사진 촬영을 하러 나선 길에서 심드렁한 나를 만나면 어쩌나 염려했는데 기우였다. 무더위 속에서도 마음에 드는 피사체를 찾아내기 위해 열정적으로 돌아다니는 나를 발견했다. 가장 우려했던 부분은 타인의 찬사를 작업의 주요한 동력으로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여부였는데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직업상 비교적 고가의 장비를 사용하고, 그 때문에 여행지에서 선망의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내가 가장 몰입하고 즐기는 순간은 마음에 드는 피사체를 향해 셔터를 누를 때였다.  


돌이켜보면 카메라를 든 상태에서는 어려운 환경을 마다하지 않았다. 평시에는 무더위를 좋아하지 않지만 카메라를 쥐고 있을 때는 땀이 쏟아지건 말건, 그로 인해 옷이 흠뻑 젖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환경이 어떻든 피사체에 몰입했다. 추위도 마찬가지였다. 카메라만 들면 강풍과 적극적으로 맞섰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직전까지 추위와 힘 겨루기를 하며 셔터를 눌렀다. 촬영 장비는 늘 무거웠지만 숙명이려니 생각하며 흔쾌히 지고 다녔다. 우붓과 짱구에서도 그러한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아는 내가 그 모습 그대로 튀어나와 촬영 현장을 분주히 뛰어다녔다.  


뷰파인더 너머의 장면을 내 감성에 맞춰 재구성하다 보면 극도의 쾌감이 밀려왔다. 그럴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감각도 한층 더 섬세해졌다. 촬영을 하러 나설 때마다 창작 행위를 하면 심신이 고양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곤 했다. 옷은 땀에 젖고, 안경에는 얼룩이 뱄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명징해졌다. 몸에도 기운이 가득 들어찼다. 정신과 신체의 조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문제점도 찾아냈다. 습관적인 슈팅이 역시 가장 큰 문제였다. 여행에서는 긴급히 슈팅해야 하는 찰나가 많았다. 일상 속 장면들이 특히 그랬다. 갑자기 눈 앞에 이색적인 광경이 들이닥치면 재고 따지고 할 겨를 없이 셔터부터 눌러야 했다.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상황들이기에 우선은 담아두고 볼 일이었다. 마음에 드는 장면도 꽤 건졌지만 놓치기도 많이 놓쳤다. 그러한 행위의 반복이 동물적인 감각을 키워 준 대신 생각 없이 셔터를 누르는 버릇을 안겼다. 꽤 열심히 찍은 사진들을 노트북으로 확인하면서 참담한 심정에 휩싸인 날이 적지 않았다. 생각하고 음미하면서 사진을 촬영할 필요를 자주 느꼈다. 우붓과 짱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늘상 고민하면서 살아오고 있었다. 나 자신의 취향과 재능, 타고난 성향, 주어진 숙명 등을 되짚다 보면 언제나 그 끝자락에서는 정체성의 문제와 마주쳤다. 오랜 관찰 끝에 파악한 내 정체성은 예술가이자 여행자였다. 근사해 보여서 꿈꾸고 다가갔기보다는 내 기질이 그쪽에 가까웠다. 삶 역시 자연스럽게 그쪽 방향으로 흘렀다. 어린 시절부터 창작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했기에 예술가의 정체성은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들였지만 여행자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 큰 진통이 따랐다. 평생 여행만 하고 살 거라 떠벌였던 여행자들 대부분이 세월에 등 떠밀려 일상으로 돌아갔듯 이따금 여행을 즐기는 것과 삶의 한 부분으로 여행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필요할 때만 여행하면 족하다고 생각해 오던 나를 삶이 자꾸만 여행길로 내몰았다. 정착 욕구가 강하게 발동하는 시기에 어쩔 수 없이 길로 나서야 해 회한에 잠긴 적도 있었다. 결국 출국행 비행기에서 펑펑 울었다. 이후에도 비슷한 경험들을 반복하면서 종국에는 여행자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됐다. 오랜 관찰 끝에 수용한 정체성이어서 이제는 내 몸에도 자연스럽게 맞는 느낌이고, 더러는 자긍심도 느낀다.  


큰 범위에서는 정체성을 확립했으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세부적인 문제들을 탐색해야 했다. 무엇을 위해 여행을 할 것인지, 어떤 식의 여행을 어떻게 할 것인지,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나 자신과 공동체 모두에게 이로운 방식으로 경제 활동을 하려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등의 문제와 씨름해 나갔다. 발리에서 머무는 동안에도 정체성의 문제를 꾸준히 파 들어갔다.


사진과 관련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무엇을 사진 찍느냐”였다. 이전에도 같은 질문을 종종 받았는데 그때는 상황껏 대답을 했다. 사진의 장르를 언급하기도 했고, 피사체의 성격으로 답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에 하지 않았던 대답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Beauty of Life." 장르나 형태 구분 없이 삶의 아름다움을 찍는다. 뱉어놓고 보니 사실이었다. 장르나 형식의 구분 없이 삶의 아름다운 장면을 뒤쫓고 있었다. 그동안 추구해 온 삶의 방향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정체성 탐구의 노력이 삶의 영역으로까지 각성을 확장시킨 셈이었다.


우붓에서 그랬듯 짱구에서도 카메라를 메고 나설 때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쫓았다. 결과는 만족과 불만족을 오고 갔지만 나로서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욱 중요했다. 순간순간에 집중하다 보면 만족스러운 결과도 조금씩 찾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내 안 어딘가가 들썩였다.




#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는 서로 비슷한 질문인 듯 보이지만 요구되는 성찰의 깊이가 다르다. 전자는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질문이고, 후자는 직업과 관련된 질문이다. 내 경우에는 사회에 진입하기 전까지 두 질문을 혼동했다. 취업만 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우들 대부분이 취업을 인생의 결승점처럼 여겼기에 나 역시 먹고사는 문제만 고민했는데 스펙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현실로 미루어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반듯한 직업은 인생살이에 많은 편의를 제공하지만 본질적인 문제까지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돈 버는 기계로 그치는 삶을 원치 않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나에게 보람을 선사하는지, 내 직업이 나에게 제대로 된 행복을 선사하는지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는 얘기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내 경우에는 나 자신과 공동체가 더불어 유익해질 수 있는 삶을 두고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철학적인 탐색도 해야 했고, 현실적인 조건과 씨름도 해야 했다. 최종적으로는 정체성의 탐색을 통해 방향성을 찾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의 문제를 아우른다. 전자를 풀면 후자는 자연스럽게 풀린다는 얘기다. 평생을 고민해야 하는 문제인 데다가 현실의 압박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발언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오랜 숙고와 경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기에 공유해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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