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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Sep 02. 2019

24. 짜라투스트라는 어떻게 여행했을까

쿠알라룸푸르 6_세기의 고전을 이정표로 삼아 나아가는 여정

KLCC,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잘 고른 책 한 권은 여행의 길라잡이가 된다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천재적인 통찰과 매서운 화법으로 기존의 사상 체계를 전복시켰다고 해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등장을 서양 철학사의 일대 혁명이라 표현할 만큼 그가 서양 철학계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서양 철학은 니체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그 사상을 집약한 저작이 바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책의 첫 장을 연 시점은 이번 여행을 떠나오기 몇 달 전의 제주 여행. 자동기술법 글쓰기를 시작한 그 여행이었다. 김포발 제주행 비행기 안에서 첫 장을 펼친 이래 제주 곳곳에서 책을 탐독해 나갔다. 제주시의 어느 이름 모를 여행자 숙소에서도 읽었고, 통유리 너머로 투명한 바다가 넘실거리는 서쪽 바다의 한적한 카페에서도 읽었으며, 지인이 잠자리로 내어 준 중산간의 고요한 방에서도 읽었다. 명성만 전해 듣다가 실제로 읽어 보니 그 필치가 굉장했다. 그 무렵 접한 책들 중에서는 단연 최고였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깊었다. 싱그러운 초목들 사이로 유채가 흐드러지는 노랗고 푸른 봄날의 제주에서 읽기에는 이만저만 무겁지 않았다. 백몇십 쪽쯤 읽다가 결국 책을 덮었다. 이후 몇 달간 책장에 묵혀 두었다.


책을 다시 뽑아 든 시점은 이번 여행을 준비하던 무렵. 반년을 예상한 여행이라 중간중간 읽을 책이 필요했다. 여러 권을 챙겨 가자니 짐이 될 듯해 오래도록 곱씹을 수 있는 책을 추렸다. 물망에 올린 책들 중 최종적으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낙점했다.


발리에 도착한 직후, 책을 다시 펼쳤다. 풍요로운 자연과 종교적 상징이 감각을 일깨우는 곳에서 마주친 니체의 문장은 제주에서보다 훨씬 더 웅숭깊었다. 제주에서도 굉장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새로운 자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은 때문인지 니체의 진가가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은유와 삶의 숨겨진 비의를 무자비하게 꿰뚫는 그 도도한 목소리에 시종일관 압도당했다. 문장 하나가 어지간한 책 한 권을 훌쩍 뛰어넘는다 싶을 만큼 고도로 압축된 문장들에 혀를 자주 내둘렀다. 놀라운 세계가 날마다 열렸다. 내 안에서 산맥이 일어나고, 문명이 몰락하고, 강이 열리고, 댐이 무너지길 반복했다. 문맥이라도 한 번 따라잡아 보겠다고 기를 썼으나 니체는 니체대로 하늘을 향해 키를 높였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내용이 워낙 무겁고 깊어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꼭지 수로는 두세 개, 쪽수로는 10쪽 정도면 금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니체 사상의 핵심이 집약된 책이다 보니 모든 감각을 동원해도 시원스럽게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이성과 감성 둘 다를 최대 출력으로 가동했음에도 앞 문장으로 되돌아가길 반복해야 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문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문장들이 월등한 도약력과 보폭으로 매양 내 추격을 뿌리쳤다. 책을 덮고 나면 그날 니체가 두드린 망치 소리가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인식이 또 다른 인식을 불러들였다.  


사상의 깊이는 범접할 수 없었지만 니체가 바라본 세계의 양상은 내가 바라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 년 전 내 정신세계가 고정관념에 잔뜩 잠식돼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적이 있었다. 이후 내 안의 상식을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직접 관찰하고 탐구해 유효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들은 가차 없이 폐기 처분하고, 유효한 것들만 그대로 뒀다. 그 과정에서 세상의 풍경이 기존과는 판이하게 달라 보이는 현상을 자주 경험했다. 이전까지 알고 있었던 바와는 정반대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많은 부분에서 명쾌해졌지만 공감대를 나눌 사람 수 있는 지인의 수는 오히려 줄었다. 그러한 가운데 만난 니체는 나에게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내가 아직 정교한 인식을 확립하지 못한 부분들을 아주 간명하게 정리해 보여주니 여간 시원하고 통쾌하지 않았다. 책을 가져오길 잘했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책을 펼칠 때마다 니체는 세상의 갖은 위선과 허위의식들을 거침없는 망치질로 때려 부쉈다. 이념이며, 종교며, 도덕이며, 학문이며, 지혜와 구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가리지 않았다. 니체가 때려 부수는 대상들은 나에게도 족쇄로 작용해 오고 있는 것들이었다. 억압을 강화하고, 결핍을 유발함으로써 내 영혼을 시들시들하게 만들어 온 것들이 코 앞에서 박살 나는 장면들에 속이 다 후련했다.  


책을 읽지 않는 순간에도 이따금 니체를 떠올렸다. 니체 혹은 니체의 또 다른 얼굴인 짜라투스트라는 어떻게 여행했을지, 여행과 그 안에서 펼쳐지는 현상들을 앞에 두고 어떻게 말했을지를 떠올려 보곤 했다. 혼잡하기만 한 현대 여행의 오장육부며, 앞사람을 따라 한 방향으로만 걷는 여행자의 대열이며, 실상을 비껴선 자아도취의 현상에 이르기까지 니체가 안쓰러워할 장면들을 종종 떠올렸다. 스스로 사고하고, 설계하고, 실행하라고 이야기하는 니체였고, 나 역시 권위자에 대한 맹신을 경계하는 입장이었기에 그의 사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도약의 높이가 월등해 그의 말을 주워 담기에 바쁜 순간이 많았다.  


인식이 깊어지고 있는 현상은 다행스러웠으나 니체와의 동행이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니체의 집요한 추궁으로 인해 고통의 웅덩이 속에서 자주 허우적거려야 했다. 오랫동안 숨겨온 내 안의 위선, 내 안의 나태함을 끝까지 추적해 집요하게 박살내기를 반복하는 니체의 솜씨에 수없이 혀를 내둘렀다.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부분까지 여지없이 들춰 댈 때마다 괴로움으로 몸을 비틀 수밖에 없었다. 맹렬한 압박과 질타에 수시로 짓눌려야 했다. 발가벗겨진 느낌도 자주 들었다. 그럴 때면 무기력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라는 놈이 한심해도 여간 한심해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너무 높았다.


울고 웃기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책의 출구에 도달했다. 그 마지막 지점에서 니체가 말했다. “짜라투스트라는 어두운 산속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불타는 모습으로 힘차게 자신의 동굴을 떠났다.” 저 멀리로 사라지는 짜라투스트라의 모습을 바라보며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쿠알라룸푸르의 숙소 라운지 한쪽에 놓인 소파였다. 책 한 권을 독파하는데 9개월이나 걸렸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돌아보면 세속적인 유혹들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주던 책이었다. 이정표 같은 문장들이 길 밖으로 벗어난 나를 손짓해 다시 제 자리로 불러들일 때가 많았다. 내 안의 허위의식을 낱낱이 발가벗길 때마다 괴로웠지만 더 나아지기 위한 고통이라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니체를 만났다. 굽이마다 펼쳐지는 간결하지만 핵심을 관통하는 문장에 끊임없이 감탄한 여정이었다. 하여 다시 한번 니체와 동행하기로 했다. 새로 읽을 다른 책도 없었다. 처음보다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동행할 수 있길 바라며 책의 첫 장을 다시 열었다.




# 니체 혹은 짜라투스트라의 자아팽창

니체의 대표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된 작품이다. 주인공의 이름인 짜라투스트라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이자 당대의 예언자인 조로아스터의 독일어 표기다. 책 속에서 짜라투스트라는 깨달음에 다가간 존재로 그려진다. 웅숭깊은 사상을 담은 문장들이 책 속에서 쉴 새 없이 펼쳐지는 이유다.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린 니체의 발언들로 인해 서양 철학의 가치 체계가 뒤집힐 정도였으니 책의 진가는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심리학자인 칼 융은 짜라투스트라 혹은 짜라투스트라를 대변자로 내세운 니체에게 극복해야 할 문제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아팽창'의 문제다. 니체는 그 강렬하고 공격적인 어투와는 다르게 여성들에 에워싸인 삶을 살았고, 건강 문제로 평생을 고생했으며, 동시대인들에게 자신의 철학적 성취를 인정받지 못해 정신적으로 불행한 행적을 보였다. 칼 융은 그 같은 경험들이 니체에게 컴플렉스로 작용하면서 자아팽창 현상이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된 문장들 또한 그에 따른 결과라는 분석이다. '자아'와 '자기'의 차이점, 그림자, 집단 무의식 등의 개념을 이용해 니체의 내면에서 일어난 현상들을 조목조목 짚어내는 칼 융의 분석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많다. 내가 책을 읽는 동안 힘들었던 것도 그와 맥락을 같이한다. 처음에는 감탄을 거듭하면서 책을 읽다가 어느 시점부터 질타당하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문장에 담긴 속뜻에 공감하는 마음과는 반대로 계속해서 위축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탁월한 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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