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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Sep 08. 2019

26. 여행으로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을까

쿠알라룸푸르 8_일상이 다시 공회전하기 시작했다

 차이나타운, 말라카, 말레이시아




너무 짧은 여행은 약효가 미미하다


한동안 무난하게 흘러가던 생활이 다시금 정체되기 시작했다. 균형 잡힌 일상을 만들기 위해 꽤 노력해 오는 와중이었다. 꾸준히 작업을 해 나가는 가운데 책을 틈틈이 읽었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도 거의 매일같이 했다. 즐겨 찾은 코스는 차이나 타운 - 센트럴 마켓 - 메르데카 광장으로 이어지는 루트였다. 나라의 독립을 선포했다는 메르데카 광장에 앉아 자립적인 삶이란 무엇인지를 자주 고민했다. 간간이 지역 탐방도 나섰다. 주 5일제 여행의 휴일을 이용해 도심의 볼거리들을 열심히 구경하며 내면에 생기를 채워 넣고자 했다. 겉으로만 보면 나쁘지 않은 일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생활이 정체되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니만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경고등까지 번쩍이기 시작했다. 결국 일상이 공회전하는 상태에 돌입했다. 


변화의 필요성은 분명히 느껴지는데 무기력의 난데없는 습격으로 감각까지 둔해진 상태라 변화를 꾀해야 할 부분이 외부 환경인지 내면의 상태인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정체 국면에 활기를 불어넣을 방법을 며칠간 고민한 끝에 외부 환경에 변화를 꾀해 보기로 했다. 지방 도시를 여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브루나이, 스리랑카, 몰디브 3국을 탐방하려던 계획을 접으면서 여행에 대한 미련이 남은 상태였다. 목적지는 현지인들이 입을 모아 추천하는 말레이시아 남서부의 해안도시 말라카로 정했다. 옛 여행에서도 호젓한 정취에 마음을 자주 빼앗겼던 곳이기에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말라카를 여행하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왼쪽 팔에 근육통이 찾아왔다. 팔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 어깨부터 팔 끝까지를 뒤덮었다. 근육통을 유발할 만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거운 물건을 든 적도 없었고, 어딘가에 부딪히지도 않았다. 분석 심리학이 제시하듯 심리적인 요인에서 기인한 현상인 듯했다. 왼쪽 팔의 사용을 자제하며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주력했으나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말라카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이동해야 하는데, 현지에 도착해서 카메라를 메고 돌아다녀야 하는데 경과를 보아하니 출발일까지 통증이 가라앉지 않을 듯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는 일. 몸은 괴롭겠지만 일단 여행을 감행하기로 했다.


모든 일을 오른팔로만 해결해야 하는 상황은 번거로웠지만 그럼에도 오랜만에 다시 말라카로 향하는 기분은 꽤 산뜻했다. 무언가 새로워지는 느낌도 받았다. 옛 추억을 향해 다가가는 느낌도 좋았다. 신나게 달리는 차창 밖으로 쿠알라룸푸르에는 없는 소박한 교외 풍경들이 담백한 모습으로 스쳐 지나갔다. 옛 여행 당시, 쿠알라룸푸르와 마찬가지로 말라카도 좋은 인상을 남겼다. 도시의 규모는 아담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이색적인 풍경들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시 찾은 말라카의 모습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지식 인력거인 트라이쇼의 장식이 극도로 화려해졌고, 시내 중심가에 거대 쇼핑몰 몇 동이 새로이 들어섰으며, 거리와 건물이 조금 더 단정하게 정비되었다는 점을 빼고는 별로 달라진 점이 없었다. 관광지들의 모습도 여전했다. 파모사 요새며, 세인트 폴 교회며, 네덜란드 광장과 차이나타운에 이르기까지 옛 기억을 되살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경이 길목 곳곳에서 펼쳐졌다. 활발하게 거리를 누비는 사이 근육통도 점점 잦아들었다. 첫째 날은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둘째 날을 기점으로 무력감이 다시금 밀려들기 시작했다. 여느 여행과 다름없이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풍경을 이따금 카메라에 담았는데 사진 촬영이 예전만큼 즐겁지 않았다. 마지못해 셔터를 누를 때가 많아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 발리 체류 당시, 사진 작업을 하면 내면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확인했는데 그와는 상황이 너무 달랐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를 종잡을 수 없어서 더더욱 답답했다.


주요 볼거리를 둘러보고 나니 여행 의욕도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가 보지 않은 뒷골목을 탐방하거나 시내 끄트머리까지 걸음을 놀리며 세상의 숨은 아름다움을 찾으러 돌아다녔을 텐데 그 많던 호기심이 다 어디로 갔는지 시야에는 시무룩한 풍경들만 잔뜩 들어올 뿐이었다. 적극적으로 의욕을 발휘하고자 했지만 밤이 다 되도록 활기는 필요 수준까지 오르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길을 잃겠다는 위기감도 문득문득 찾아들었다. 마음이 흩날리면서 만사가 귀찮아지고 여행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확신이 떨어지는 현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나하나 짚어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마음은 오히려 안절부절을 반복했다.


그 와중에 이십 대 한국인 여행자 4인방과 인연이 닿았다. 나는 나대로 몇 달 동안 한국인과의 교류가 없었고, 그들은 그들대로 여행의 새 인연이 반가웠기에 차이나 타운 근처에서 맥주를 마시기로 약속을 잡았다. 저녁에 다시 만난 4인방은 씩씩하고 사랑스러웠다. 대화의 흐름도 좋아서 왁자지껄 많은 얘기를 나눴다. 가볍게 시작한 술자리였으나 분위기가 사뭇 뜨거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대화를 나눴다. 


떠들썩한 술자리를 마치고 4인방 중 한 명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숙소를 향해 걷는데 그가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아도 되는지를 물어왔다. 그러라고 하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행 중에 도난 사고와 연애 문제가 잇따라 터지면서 혼란을 겪고 있다는 사연. 다른 때 같았으면 그의 이야기에 침착하게 반응했을 텐데 어떻게 호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으나 스스로도 두서없다 싶은 발언들만 잔뜩 튀어나올 뿐이었다. 내면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낀 순간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안토니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역시 고민을 토로하는 내용. 한 여성 여행자를 만나 2주를 함께 여행했는데 그녀가 만든 구덩이 속에 빠졌다고 했다. 전날 자살을 시도한 그녀와 곧 만나기로 했는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하단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능력을 초과하는 상황인데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설명. 의견을 구하기 위해 대화를 청해 온 듯 보였지만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나는 대로 주섬주섬 이 얘기 저 얘기하다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하루 종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하수선한 느낌으로 침대맡을 덮쳐왔다.


셋째 날과 넷째 날에는 휴식을 충분히 취했다. 도시 내부의 관광지는 어지간히 돌아본 상태였다. 두세 번씩 다녀온 곳도 여럿이었다. 관광지 구경보다는 정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해 보였다. 지방 도시 여행으로도 큰 소용이 없었으니 방법을 달리해야 할 터였다.




# 여행 효과는 기간에 비례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라카행은 여행 효과를 만들어 내기에 기간이 너무 짧았던 것 같다. 한 달 가까이 체류하면서 감각이 둔해져 있던 쿠알라룸푸르보다는 많은 자극을 받았지만 그래 봐야 쿠알라룸푸르에서 대중교통으로 2시간 반이면 닿는 곳이어서 멀리 떠나온 느낌은 없었다. 차라리 브루나이-스리랑카-몰디브 3국 여행을 한 달 정도 했다면 상태가 꽤 변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본래의 여행 목적에 반하는 흐름이 생길 가능성이 높은 탓에 감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숱하게 경험한 바, 여행 효과는 기간에 비례하는 것 같다. 물론 사람마다 편차는 있을 테지만 자극의 민감도에 따른 상대적 차이일 뿐, 개인 안에서는 기간과 효과의 비례 현상이 동일하게 발생하지 않을까 싶다. 여행하는 삶을 살게 되면서 때때로 여행이 일상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내 경우에는 최소 일주일 이상 여행을 해야 내면에 변화가 생긴다. 초기에는 3박 4일만으로도 큰 자극을 받았던 제주 역시 지금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는 여행해야 상태에 변화가 일어난다. 지금까지의 여행 경험과 주변의 다양한 사례들을 고려할 때 여행은 무기력 극복에도 큰 도움이 된다. 대신 일정을 충분히 확보할 필요가 있다. 변화가 필요해서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비용 문제에 부딪쳐 기간 축소를 고민하고 있다면 눈 딱 감고 기간을 최대한 넉넉하게 확보하기를 권한다. 돌아왔을 때의 상태가 좋아야 현실에도 대담하게 맞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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