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영진 Sep 13. 2019

30. 이토록 아름다운 시절

치앙마이 3_흠잡을 데 없는 환경, 그림 같은 일상

님만해민, 치앙마이, 태국




감각적 삶은 일상의 차원을 높인다


더없이 행복한 나날이 흐르고 있었다. 생활환경 조성을 마무리하면서 루틴도 금세 자리를 잡았다. 일상의 흐름은 단조로웠지만 일과 곳곳에 배치해 둔 기분 좋은 활동들이 행복의 두께를 키웠다. 평일에는 차분한 마음으로 작업에 매진하다가 주말이 되면 인근으로 스쿠터를 몰고 나가 사진도 찍고, 현지 문화도 체험하면서 여유를 누렸다. 


하루의 일과는 대강 이런 식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시각은 아침 9시 정도. 곧바로 세면을 하고 협업 공간으로 나가 오전 작업을 했다. 이후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들고 숙소로 복귀해 수영을 했다. 어림잡아 15m x 20m 규모의 수영장은 운동 효과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벼운 물놀이나 가능한 관상용 수영장을 보유한 레지던스도 많던데 한국의 구청 수영장에 버금가는 크기라 체력 관리를 하기에 충분했다. 샤워까지 하고 나면 만족지수가 급격히 상승했다.


이후 개운한 기분으로 다시 협업 공간에 나가 오후 작업을 시작했다. 중간쯤에는 협업 공간의 마당에 놓인 스윙 체어나 실내 공간의 통유리창 옆에 놓인 빈백에 누워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졸음이 쏟아지면 20분쯤 낮잠을 잤다. 읽던 책을 배 위에 얹고 눈을 감으면 아이스크림 녹듯 의식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면 2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책을 마저 읽은 후 일어나서 다시 작업을 하다 보면 저녁이 찾아왔다.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챙겨 먹고 협업 공간으로 돌아와 남은 작업을 한 후 스쿠터를 몰고 숙소로 복귀하면 어느새 밤이었다. 두세 시간쯤 쉬다가 침대에 누우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잠이 밀려왔다. 바지런히 시간을 보낸 날에는 하루가 상당히 긴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기분이 풍요로워졌다.


협업 공간 멤버십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세 곳의 지점 중 내가 가장 좋아한 곳은 님만해민 지점이었다. 시설의 수준이나 쾌적성은 최근 신설된 구시가 북부 지점이 가장 괜찮았고, 각종 사원들을 비롯해 현지의 전통문화를 체험하기에는 구시가의 중심부에 위치한 또 다른 지점이 더 훌륭했지만 나로서는 님만해민 지점이 제일 좋았다. 조용한 동네 분위기와 거목에서 뻗어나간 나뭇가지들이 드리운 널따란 그늘, 여백이 많은 녹색의 마당 등이 특히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마당 한가운데에 놓인 스윙 체어와 실내 공간에 놓인 빈백도 커다란 행복을 선사했다. 님만해민 지점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마음이 편했다. 그동안 이용한 협업 공간들을 통틀어 치앙마이의 협업 공간이, 그중에서도 님만 해민 지점이 내 마음을 가장 안락하게 만들었다.


스윙 체어에 누워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 와중의 20분짜리 낮잠은 심신을 해독하는 데도 제격이었다. 단잠을 자고 일어나면 정신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졌다. 나른함의 절정에서 시공간의 개념이 녹아내리는 느낌도 받았다. 머리로는 치앙마이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감각적으로는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상상 속의 제3지대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스윙 체어에 누워 마당 위를 거대하게 뒤덮은 나뭇가지들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여기가 어디지 싶었다. 그 느낌이 아주 몽환적이었다. 햇살을 보드랍게 받아 반투명으로 살랑거리는 무수한 나뭇잎과 그 위로 펼쳐진 중간 색조의 하늘이 아름다움과 처연함의 경계를 자주 무너뜨렸다. 그럴 때마다 묘한 행복감이 찾아들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스윙 체어에 누워 있다가 머리 위로 드리운 나뭇가지 위에서 다람쥐가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모습을 구경했을 때였다. 낮잠에서 이제 막 깨면서 나른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인지 햇살을 받아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선명하게 물결치는 머리 위 풍경이 그림처럼 느껴졌다. 늦은 오후 특유의 진한 색감과 질감까지 인상적으로 어우러져 기분은 더욱 묘해졌다.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몽롱한 기운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내 위에서 다람쥐는 나뭇가지와 전선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녔다. 20여 분을 넋을 놓고 구경했는데 그 풍경이 꽤 황홀했다.


주말에는 스쿠터에 몸을 싣고 라이딩을 했다. 활동량이 부족하다 싶은 날에도 이따금 스쿠터에 시동을 걸었다. 가장 자주 찾은 곳은 치앙마이 대학교였다. 넓은 부지와 수려한 교정이 산뜻한 표정으로 나를 반기곤 했다. 내 단골 방문지는 인문대학 앞에 자리한 호수였다. 초록 숲이 어우러지는 호숫가를 산책하며 여유를 누리다 보면 마음이 더욱 평온해졌다. 예전의 치앙마이 여행에서도 호수의 모습이 유독 기억에 남았는데 다시 와서 봐도 역시 아름다웠다. 교정을 오고 가는 학생들의 인상도 밝고 온화했다. 싱그러운 그 모습들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모두들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시절을 누리고 있을 터였다.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치앙마이 대학을 찾아올 때도 있었다. 협업 공간 인근의 식당들이 지겨워질 때면 노천 식당들이 대학 담벼락을 따라 늘어선 치앙마이 대학교의 먹자거리로 달려가 저녁을 해결했다. 학생들과 관광객들이 뿜어내는 열기에 휩싸여 식사를 하다 보면 여행의 감성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스쿠터를 몰고 교정 안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안 가본 곳을 달렸다. 그러다 보면 스쿠터는 언제나 호숫가에 닿았다. 내가 스스로 찾아갔다기보다는 마음이 자신이 원하는 행선지로 나를 실어 나르는 형국에 가까웠다.


어느 날 저녁,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발길이 호숫가에 닿았다. 호수의 테두리를 따라 걷는 동안 초목이 뿜어내는 시원한 공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숲으로 에워싸인 호숫가는 도심보다 훨씬 시원했다.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여러 종의 벌레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각자의 존재를 알려왔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벌레들의 합창 소리가 상당히 컸다. 데시벨이 꽤 높은데도 그동안은 벌레들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연에는 완전한 고요, 완벽한 침묵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보다 멀리까지 퍼져 나가는 벌레들의 노랫소리가 듣기에 아주 좋았다.


치앙마이에서의 생활은 나무랄 만한 점이 거의 없었다. 기후 좋겠다, 물가 부담스럽지 않겠다, 협업 공간에 멤버십 등록 해 놓았겠다, 언제 어느 곳으로든 편히 이동할 수 있는 스쿠터 렌트해서 몰고 다니고 있겠다, 아늑하고 편안한 레지던스에 살고 있겠다, 스트레스를 주는 관계 없겠다, 흠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었다. 


기분 좋은 피로가 자주 몰려드는 치앙마이의 일상. 소정의 목표를 안고 오른 길이어서 성과 창출의 강박이 종종 찾아오긴 했지만 그 압력을 상쇄해 줄 만한 요소들이 주변에 많았다. 잠시 불안감을 느끼다가도 다시 평온한 순간이 찾아들곤 했다. 더러는 일상의 미시적인 국면들에서 극도로 아름다운 찰나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무중력 상태에 놓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묘한 순간이 이따금 찾아오는 치앙마이의 생활은 감각적 삶 그 자체에 가까웠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나른한 시공간 속에서 일상이 기분 좋게 앞으로 나아갔다.




# 행복한 일상의 체험과 그 후의 현상

각박한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일상을 높은 수준으로 체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욕심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 대체로는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편이지만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한 일상을 누렸던 적은 거의 없다. 그러던 차에 치앙마이에서 전에 없던 행복한 일상을 누렸다.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는 호화 별장이나 마이애미 앞바다에 띄운 개인 요트는 내 인생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불심 가득한 평화의 도시 치앙마이에서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당시의 경험은 그때의 현상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도달 가능한 범위 내에서 더 높은 단계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몸에 새겨진 행복의 기억이 삶을 향한 의욕을 높여주었다. 또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삶의 조건들이 무엇인지도 좀 더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 주었다. 본문에서도 언급했듯 치앙마이에서의 생활은 감각적 삶 그 자체였다. 감각적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차원이며, 그 과정에서 새겨진 기억은 몸에 오래 남는다. 그 기억이 삶을 나아가도록 한다. 감각적 삶을 체험하는 시간인 여행도 그러한 역할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29. 내 생애 최고의 잠자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