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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영진 Jan 25. 2019

로마 (Roma)

멕시코시티 로마... 이탈리아 말고

할리우드 영화와 미드 속 멕시코는 범죄의 온상이다. 실제로도 현재 마약 조직들과의 내전 상황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경찰서가 테러당하고, 마약과의 전쟁을 주도한 시장이 총격으로 살해당하고, 거리에서 잔인한 살인이 종종 벌어진다. 뿐만 아니라, 정치인과 교육계 등이 부패와 갈등으로 재기능을 못하고 있다. 하지만 멕시코를 많은 잠재력을 가진 나라이다. 1억 2천만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석유와 광물이 풍부하고,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지정학적 이점을 갖고 있다. 땅이 비옥하여 고대부터 다양한 문명이 자리 잡았으며, 마야문명이 번창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통을 중요시 여기고 가족을 사랑하는 따뜻한 사람들의 나라이다.


멕시코는 우리와 닮은 점이 많다. 픽사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가족을 중시하고 조상을 기리는 풍습을 보았다. 가장 일반적인 멕시코 할머니들을 모델로 한 '코코'는 우리의 할머니들과 놀랍도록 닮았다. 오늘 리뷰 할 영화 <로마>를 통해서는 멕시코 근대사 속 민주화의 상처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우리의 역사와 맞닿아있다. 1970년대 초반 멕시코는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르며 한창 성장가도를 달리는 듯 보였지만, 독재와 부패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1971년 6월,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정부 지원을 받은 우익 무장단체 ‘로스 알코네스’가 무력 진압하며 120여 명을 살해한 ‘성체 축일 대학살’ 사건이 벌어진다. 영화는 이 사건의 1년쯤 전부터 시작된다. 

감독 자신과 어릴 적 함께 살았던 가정부 '리보'를 모델로 한 막내아들 페페와 클레오


 <로마>는 2018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2019년 골든글로브 감독상을 수상한, 최근 영화계와 비평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 본인의 어릴 적 경험을 근간으로 한다. 제목 ‘로마 (Colonia Roma)’는 멕시코시티의 대표적인 부촌 지역으로 감독의 고향이다. 주인공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는 이 지역 내 한 중산층 가정에서 일하는 가정부인데, 쿠아론 감독이 어릴 적 함께 살았던 보모이자 가정부 ‘리보 로드리게즈’를 모델로 하고 있다. 감독은 모든 스텝을 현지인으로 고용했으며, 여주인 소피아(마리아 데타비라)를 제외한 배우들을 연기 경험이 없는 초보들로 구성했다. 흑백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대신 다양한 소리들로 가득 채웠다. 덕분에 실제 쿠아론 감독의 기억을 공유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페페, 죽어있는 것도 괜찮다"


이 영화는 클레오와 여주인 소피아 부인이 겪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소피아의 남편 안토니오 (페르난도 그레디아가)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고, 생활비도 보내주지 않는다. 클레오의 남자 친구 페르민 (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로)은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듣자 극장에 그녀를 남겨두고 사라져 버린다. 개인적 비극은 사회적 불안감 속에 더욱 증폭된다. 클레오가 페르민을 마지막으로 본 곳은 ‘성체 축일 대학살’이 벌어진 폭력의 현장이다. 소피아에게는 4명의 아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비극적 현실에 익숙해져 있다. 둘째 파코 (카를로스 페랄타)는 식사를 하며 군인이 쏜 총에 죽은 아이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지진으로 무너진 천장 시멘트에 덮인 신생아실 인큐베이터처럼 비극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가까이 있다. 장난감 총싸움에서 총에 맞았다며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바라보는 막내아들 페페 (마르코 그라프) 옆에 누운 클레오의 말처럼 죽은 것도 나쁘지 않다. 삶이 더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떠난 후 아이들과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소피아


<로마> 속에는 아이들과 여자들을 지켜주어야 할 가장으로서의 남자들이 부재하다. 그들은 번지르하게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비겁하게 도망친다. 무술가로서의 길을 가겠다고 호언했던 페르민은 우익 깡패가 되었고, 응급실에 들어가는 크레오를 지켜줄 것처럼 말하던 안토니오도 슬그머니 발을 뺀다. 반면 여자들은 남자들이 만든 비극의 피해자이자, 희망을 책임지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끝까지 가정과 아이들을 지킨다. 굳이 남녀를 이분법적으로 표현한 것이 맘에 들지는 않는다. 대신 권력을 가진 소수와 그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비유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안토니오가 집에 걸맞지 않게 큰 차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권력을 가진 이들은 그들의 욕심으로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쿠아론 감독의 아버지도 어릴 적 가정을 버렸다. 그에게는 그를 길러주고 지켜준 가정부 ‘리보’가 진정한 영웅이었고, 그렇게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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