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 관한 생각

글을 쓰는 이유 - 두 번째

by 김영진

이것은 세계에 대한 나의 '출력값'이다.

이제 겨우 두 번째 글인데 너무 어려운 도전을 하는 것은 아닐까 망설여진다. 한 호흡으로 전달하기에는 그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고 거대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쓰기도 어렵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읽히기는 더욱 어려울 것 같다.

긴 글이 될 것이다. 목적이 나의 세계관을 선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설명해 내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세계와 외로움, 결심을 당신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도 부담이 되겠지만, 부디 나의 세계를 흥미롭게 읽어내길 희망하며 글을 써내린다.


어릴 적 나는 말을 잘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말발을 무기로 반장이며 학생회장이며 안 해본 것이 없었고, 남들을 잘 설득한다고 '설득 김영진'이라며 호를 붙여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 설득은 고사하고 메세지 자체가 상대방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나는 분명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을 텐데. 대체 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아마도 나의 말하기 능력이 퇴화했나 보다 하며 아쉬워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같은 세계에서 살던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졌을 줄이야.

알고 보니 나는 어느새 혼자 남겨졌던 것이다.

주변의 이들이 다른 세계에 있는 줄도 모르고, 내 세계의 이야기만 떠들어 왔으니 말이 통할 리가 있나!




1. 세계에 관하여


흔히 세계라는 단어를 들으면 이런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Source: 국토지리정보원

그런데, 이것이 정말 당신의 세계가 맞는가?

물론 배웠을 것이다. 누군가 증명했단다. 비행기를 타고 직접 가볼 수도 있단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묻는다. 당신의 세계는 지도와 일치하는가?


지도에 표시된 세계는 당연히 실재한다.

아니,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이 시뮬레이션일 가능성도 있다지 않은가?

그런데, 실재하든 하지 않든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는 아닐 테니 말이다.


다섯 살 쯤이었던가 외국의 개념을 처음 알게 된 때를 기억한다. 누가 나에게 바다 건너 다른 나라가 있다고 했다. 나는 '아, 우리 동네 같은 게 바다 건너에도 있구나!'하고 이해했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막, 빙하, 정글 같은 건 떠올려보지도 못했다. 그저 아파트가 있고 놀이터가 있고 친구들이 있는 이런 동네가 여러 개 있는 줄 알았다.

나에게 세계란 우리 동네가 전부였다.


당신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터무니없이 작은 세계에서 살던 때를 기억할 것이고, 그 세계가 확장되던 순간 또한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2. 세계의 그림자에 관하여


한번 떠올려보자. 세계가 아주 작았던 때, 그러니까 나의 경우엔 우리 동네가 곧 세계였던 때.

나는 어쩌다 세계를 그런 모습으로 인식하게 된 걸까?


작가 채사장의 견해를 인용하면 이를 직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저서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에서 작가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며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고유한 세계 속에 갇혀 살아간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자폐아다."라며 도발적인 선언을 한다. 채사장은 이것이 동서양 철학의 중요한 결론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지금 당신의 자아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실제 세계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감각기관과 주관에 의해 왜곡되고 재구성된 그림자일 뿐이다. 당신은 실제 세계의 모습을 인식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뇌가 그려주는 '세계의 그림자'를 인식한 것이다.

뇌가 그려준 그림자라는 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어느 가족의 예시를 통해 이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 30대 남자 A가 있다. 그에게는 60대의 어머니와 만 3세의 자녀가 있다. 그들은 각자의 필터 즉, 감각기관과 주관에 비추어 A를 인식한다.

어머니에게 A는 언제나 챙겨줘야 하는 어린이 같은 존재다. 반대로 자녀에게 A는 스스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초인 같은 존재다. 그런데, A는 평범한 남성이다. 어린이도 아니고 초인도 아니다. 그의 가족은 실제의 A를 인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뇌가 그려준 왜곡된 A 즉, '그림자'를 인식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A의 가족들이 인식한 그림자의 형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고유한 감각기관과 주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다. 그리고 이 사실은 곧 '인간이 모두 자폐아'라는 도발적인 선언의 근거가 된다.

대전제: 인간은 자신의 감각기관과 주관에 의해 비친 세계의 그림자를 세계로 인식한다.
소전제: 인간은 고유한 감각기관과 주관을 갖고 있다.
결론: 따라서 인간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고유한 형태다.

즉,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 속에 갇혀 살아간다는 채사장의 주장이 연역적으로 논증되는 것이다.


그의 설명 덕분에, 우리는 자아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세계를 인식하게 되는지를, 세계의 그림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마지막으로 우리가 인식한 세계가 모두 다른 형태라는 사실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다시 당신의 세계를 떠올려보자.

당신의 세계 속 어머니의 그림자는 어떤 형태인가? 실제의 그녀와 일치하는가?

당신이 속한 집단, 지역, 국가, 세계를 구성하는 그 모든 것들의 그림자들은 어떤가? 지도와 일치하는가?


누군가 당신 대신 이 질문에 대답했다.

어느 초딩(은 아닐 것 같지만)이 그린 세계 지도




3. 무엇이 문제인가?


세계와 그림자에 대한 설명을 마쳤으니, 이제 당신에게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의문에 대해 논의할 차례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가? 사람마다 인식하는 세계가 고유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고 들면 전 세계의 꽃도 나비도 구름의 모양도 모두 고유하다. 하지만 닮아 있지 않은가? 닮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같은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꽃을 모두가 꽃이라고 생각할 것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맞는 말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고유하지만 닮아 있기도 하다. 그리고 닮은 것들에 한해 서로 이해할 수 있다. '어느 초딩이 그린 세계 지도'가 그 증거다. 한국에서 오래 산 사람이라면 별다른 설명 없이도 지도의 의미를 이해하고 가볍게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아마존의 어느 원시 부족민에게도 같은 이해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곳에는 '메시'가 알려지지 않아 '메시의 그림자' 또한 없을 것인데 말이다.


당신은 아마도 내가 왜 갑자기 원시 부족민과 같은 극단적인 사례를 들먹이는지 의아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아닌가? 한국인과 그들의 차이만큼이나 우리의 세계가 다르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논의를 이어가고 싶다.

어떤 특별한 순간이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는 나와 타인이 같은 세계에서 살고 있다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내 세계에 있는 것들이 당연히 상대의 세계에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착각은 관성에 기인한다. 곧 설명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동일한 세계'에서 시작해 점차 '다른 세계'로 변하기 때문이다. 즉, 이미 남들과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함께 살아가던 시절의 잔상을 관성처럼 받아들여 착각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차례로 설명할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신과 나의 세계가 처음에는 아주 비슷했을지 모르지만, 마치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 만큼이나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해시켜 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으로 인해 겪게 되는 문제인 '필연적인 외로움‘을 도출하여 조명하고자 한다.




4. 같은 세계에서 함께 살던 때가 있었다


우리에게도 주변의 이들과 같은 세계에서 함께 살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의 주관이 없다시피 하던 때가 그랬고, 다른 이들과 엇비슷하던 때가 그랬다.


주관이 없다시피 하던 때는 영/유아기다.

이때 당신의 세계는 보호자의 세계로부터 탄생한다. 당신의 미약한 감각기관과 없다시피 한 주관은 스스로의 세계를 그려내지 못하기 때문에, 당신은 보호자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시기에 보호자는 자신의 세계에 종속된 당신을 마치 손바닥 위에서 바라보듯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 또한 당신 세계의 크기만큼은 보호자를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세계는 (당신의 관점에 한해) 보호자와 ‘동일한 세계’다. 그리고 당신은 타인과 같은 세계에서 함께 살고 있다고 믿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만족감, ‘세계의 일체감(이하 일체감)’을 최초로 경험하게 된다.


주관이 엇비슷하던 때는 아동/청소년기다.

이때 당신의 세계는 공통 교육이 그리는 세계에 의존한다. 당신의 감각기관은 충분히 발달했으며, 주관도 점차 자라나고 있다. 이 주관으로 인해 당신은 공통 교육이 그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그 범주 안에서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

보호자로부터 탄생한 당신의 세계는 주관에 의해 분기되어 공통 교육에 근거한 그림자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당신과 보호자/교육자는 공통 교육의 큰 범주에서는 서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주관에 의해 세계가 달라졌으므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점들 또한 생겨난다.


다행인 점은 이 시기에 당신과 거의 똑 닮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존재들 덕분에 우리는 아동/청소년기에도 여전히 일체감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존재는 바로 동급생들이다.

아동/청소년기에는 동급생 간 신체 기능과 주관의 발달 정도가 엇비슷하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차이가 존재하지만, 교과서, 교복, 규율, 객관식 시험 등 공통 교육이 학습자에게 강요하는 천편일률적인 틀들은 이 차이를 균질화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로 인해 동급생들은 아주 비슷한 필터를 갖게 되어 비슷한 그림자로 세계를 채워나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같은 공통 교육을 받은 동급생은 아주 '닮은 세계'를 공유하게 되며, 함께 일체감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에 설명할 '필연적인 외로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에 경험한 일체감이 어떤 느낌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 만족감의 정도는 개인의 성장 환경에 따라 편차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것을 일반화해 제시하기보다는 각자의 주관적 경험에 의존해 가늠해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영/유아기에 보호자와 함께 보낸 순간들을 떠올려 볼 수 있겠는가? 보호자의 품 속에 안겨 '나는 안전하고, 아무 걱정이 없고, 이 세상이 아주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낀 순간들 말이다. '동일한 세계'에서 살고 있던 당신은 아마도 이 시기에 가장 강렬한 일체감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시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경우엔 아동/청소년기의 일체감으로 대체하여 그 기분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공통 교육을 받던 시절의 단짝 친구들을 떠올려 보라. 답답한 선생님이나 보호자와는 달리,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뭐든 찰떡같이 알아듣고, 우리만의 은어를 공유하며 배꼽 빠져라 함께 웃던 친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보냈던 행복한 나날들이 기억나는가?

바로 그것이 그 시절 우리가 친구에 죽고 못살았던 이유이자, 일체감이 당신에게 주었던 만족감이다.




5. 그리고 당신과 나의 세계는 달라진다


'닮은 세계'는 공통 교육의 종료와 함께 '다른 세계'로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먼저, 공통 교육의 종료가 왜 변화의 트리거가 되는지를 살펴보자. 아동/청소년기에 형성된 '닮은 세계'는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이 유지되어야만 지속될 수 있다.

첫째, 필터의 동질성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필터에 비추는 세계의 범위가 같아야 한다.

대상이 같더라도 필터가 바뀌거나, 필터가 같더라도 대상이 바뀌면 비치는 그림자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통 교육이 종료되면 이 필터의 동질성도, 세계의 범위도 모두 달라지게 된다.

필터의 동질성 변화는 엄밀히 말하자면 교육 과정 도중에 시작된다. 학생들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점차 뚜렷한 개성과 주관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통 교육이 지향하는 몰개성성과 시험과 같은 눈앞의 목표는 이 주관의 발현을 억제한다. 따라서 공통 교육 도중에는 이 동질성이 유지되다가, 졸업과 동시에 억눌려 있던 주관이 발현되며 필터가 변하게 된다.

한편, 세계의 범위 변화는 교육 과정 졸업과 동시에 시작된다. 그 이전까지 학생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이 시기에 그들이 마주하는 세계는 학교와 그 주변부, 그리고 공통 교육의 내용뿐이다.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므로, 마주하게 되는 세계의 범위 또한 바뀌게 된다.


공통 교육의 종료가 변화의 트리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왜 급격하게 변하게 되는지를 살펴볼 차례다.

이 급격한 변화는 세계의 범위보다는 필터의 변화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공통 교육이 종료되더라도 학생들이 마주하게 되는 세계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계획에 없던 유학이나 이민 등 예외적인 상황도 있으나, 대부분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영역에서 생활하게 된다. 따라서 필터 변화가 세계에 끼치는 영향만으로도 이 급격한 변화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필터가 바뀌면 세계의 그림자도 단숨에 바뀐다. 카메라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카메라를 들고 '흑백 필터' 기능을 활성화해 보라. 한순간에 렌즈를 통해 비치는 세상이 흑백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향이 새로 비추는 대상에 한해서만 유효할 가능성도 있다. 만약 필터의 변화가 기존에 인식했던 그림자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세계를 급격하게 바꾼다 주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필터의 변화는 기존에 인식했던 대상의 그림자까지 바꾼다. '아기 공룡 둘리'의 예로 이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인식했던 둘리와 고길동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 둘리는 착한 주인공이고 고길동은 빌런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 다시 그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얹혀사는 주제에 온갖 패악질을 부렸던 둘리가 빌런이고 고길동은 마음씨 착한, 그런데 재력과 문무까지 겸비한 완벽한 남자다.

Source: 퀴퀴한 일기, 아기 공룡 둘리

이해하겠는가? 당신의 세계에 비친 고길동의 그림자가 빌런에서 히어로(?)로 바뀌었다. 당신은 이러한 인식 변화가 고길동에 대해 꾸준히 생각을 거듭해 온 결과 얻게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어느새 바뀌어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런 변화가 당신의 세계 곳곳에 이미 일어났다는 사실 또한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당신은 필터의 변화가 새로운 대상뿐만 아니라, 기존에 인식했던 세계의 그림자까지 한 번에 바꾸어버리는 거대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그래서 공통 교육이 종료되면 '닮은 세계'가 '다른 세계'로 급격하게 바뀌어 버린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납득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남은 한 걸음은 '얼마나' 달라지느냐에 관한 것이다. 이 논의를 최대한 간결하게 전개하기 위해, 세계가 변화하는 전체 과정을 간단한 이미지로 정리해두고자 한다.

위 그래프는 한 사람의 세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가 다른 사람의 세계와 서로 달라진다는 사실은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마저 표현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이질성'이라는 하나의 축을 추가해 3차원 그래프로 나타내야 해야 한다.

이제 그래프는 한 사람의 세계 변화 양상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세계와 서로 달라진다는 사실까지 잘 나타내게 되었다.




6. 당신은 마치 평행 우주 속의 나다.


'닮은 세계'가 '다른 세계'로 변할 때, 세계는 얼마나 달라지게 되는가? 이것을 논증하는 것이 아마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얼마 정도' 달라진다는 몇 가지 귀납적 사례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모든 세계가 똑같은 결론에 이를 것이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일반 원리를 찾아내 연역적으로 결론을 유도해야만 이 논증을 완료할 수 있다.

하여 나는 지금부터 다른 사례로부터 연역적 논증을 위한 일반 원리를 도출해보려 한다. 이 과정이 난해할 수 있는데, 읽기 힘든 경우에는 내가 마지막에 제시할 예시로만 이것을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평행우주론을 알고 있는가? 혹시 개념에 친숙하지 않은 분들이 계실 수 있으므로 내용을 가볍게 설명해 두는 것이 좋겠다.

평행우주론은 현대 물리학의 주요 가설 중 하나로,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 외에 다른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개념이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에 따르면, 평행 우주는 마치 한 나무에서 자라난 가지들처럼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양자 사건을 계기로 분기되어 별개의 우주로 발전한다.
가령, 내가 복권을 살까 고민하다 사지 않았다면, 평행 우주 중 한 곳에는 복권 1등에 당첨된 내가 있다. 또 어느 우주에는 그날로 직장을 때려치우고 유흥에 빠진 내가 있는 한편, 직장을 다니며 당첨금을 더 크게 불릴 방법을 고심하는 내가 있다.
이런 식으로 평행 우주는 무한히 분기되며, 분기된 시점이 가까울수록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분기된 지 오래되면 도저히 같은 역사를 공유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다른 우주가 된다.

신기하지 않은가. 우주가 무한히 존재할 수 있고, 같은 우주가 분기되어 완전히 다른 우주가 된다니 말이다.


물론, 다세계 해석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고 실험이다. 즉, 양자역학에서 주장하는 몇 가지 가정들이 참이라고 전제할 때만 논리적으로 유도되는 결론이다.

그러나 다수의 현대 물리학자들이 이 가설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가정이 틀릴 가능성은 있더라도 결론을 유도하는 논리 구조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다세계 해석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세계의 변화 양상과 퍽 닮아 있다. 이 구조적 유사성을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즉, 다세계 해석에 비유하자면 '동일한 세계'는 최초의 우주이며, 주관의 발달이나 공통 교육의 종료는 일종의 양자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을 기점으로 세계가 분기되어 '다른 세계'로 발전하게 된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챘는가? 그렇다. 언급했듯 다세계 해석은 여러 물리학자들로부터 검증된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는 가설이다. 나는 이 가설의 논리로부터 일반 원리를 도출하려는 것이다. 만약 도출된 일반 원리가 '세계의 변화 양상'에도 적용된다면, 우리는 다세계 해석과 같은 논리적 결론을 유도할 수 있게 된다.


먼저, 다세계 해석에 적용된 논리 구조를 도식으로 나타내 보자.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 논리 구조

이 논리 구조에서 최상단 결론을 유도하는 근거들의 일반원리를 도출하면 다음과 같다.

1. 분기의 필연성 - 어떤 사건이 필연적으로 세계의 분기를 일으킨다.
2. 독립성 - 분기된 세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한다.
3. 차이의 누적성 - 독립적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시적/거시적 차이가 지속적으로 쌓인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세계의 변화 양상'에 이 세 가지 원리가 적용된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으면 논증을 완료할 수 있다.

1. 분기의 필연성: 인간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분기된다. 분기는 주관의 형성과 동시에 발생하며, 동급생들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공유하다 공통 교육의 종료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달라진다.
2. 독립성: 채사장을 인용하여 논증했듯, 인간은 스스로 그려낸 세계에 갇혀 살아간다. 세계는 당사자의 필터에 의해서만 형성되며, 이는 타인의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과 독립적이다.
3. 차이의 누적성: 개인은 고유한 필터로 고유한 인생을 살아간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평생 자기 인생만의 고유한 그림자로 세계를 채우며 살아간다.


이제 우리는 세계가 '같은 역사를 공유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연역적 추론에 익숙하신 분들은 납득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고개를 갸웃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분들을 위해, 몇 가지 귀납적 예시를 마저 살펴보는 것으로 길었던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동일한 세계' → 전혀 '다른 세계'의 사례:

정치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끼리 논쟁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예를 들어 할아버지와 삼촌이 정치 얘기를 하다 연을 끊었다거나 하는 경우들 말이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 보면 그들의 세계가 어쩜 이렇게 다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진보적인 삼촌의 관점에선 사회의 모든 것이 불공평하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 사람들이 다수를 착취하며 산다. 그래서 정부가 그들의 것을 재분배하여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보수적인 할아버지의 관점에서 사회는 이미 정의롭다. 사회는 개인의 노력으로 부를 이룰 수 있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완벽하진 않겠지만 어차피 그런 이상향은 없다. 따라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부를 게으른 자들에게 나누자는 발상이야말로 불공평한 것이다. 두 사람은 온갖 사례를 들며 논쟁을 이어가지만 절대로 상대를 이해시킬 수 없다. 두 사람은 각자의 세계에서 맞는 말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계는 원래 같았다. 삼촌의 세계는 보호자였던 할아버지의 세계로부터 탄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생 동안 자신만의 그림자로 세계를 키우다 보니, 어느덧 서로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각자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영영 화해할 수 없다. 세계의 이질성은 살아갈 시간에 비례하여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닮은 세계' → 전혀 '다른 세계'의 사례:

사이비 종교에 빠진 동창을 만난 경험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당신의 기억은 분명 끔찍할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정상적'이었던 친구가 미쳐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친구는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이 믿는 신, 또는 교주와 연관 지어 말했을 것이다. 그의 세계는 이미 종교에 관한 것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는 당신이 답답했을 것이다. 진리가 경전에 있고 구원이 눈앞에 있는데 대체 왜 이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그는 진심으로 당신을 구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을 전도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 친구와 당신은 공통 교육을 받던 시절 닮은 세계를 공유했다. 닮았기 때문에 그때는 당신의 관점에서 그 친구가 '정상적'이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필터로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는 다른 세계를 살게 되었다. 아마 지금도 그 친구는 당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릴 땐 말이 통하는 정상적인 친구였는데...".




나는 지금까지 당신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당신과 나는 각자의 그림자 세계 속에 갇혀 살고 있다. 우리 세계는 한때 닮았던 적이 있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 평행 우주 비유 속에는 꽤 낭만적인 메세지도 하나 남겨 두었는데, 그건 언젠가 다른 글에서 마저 설명하겠다.


이제 당신은 세계에 관한 나의 생각을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 내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신은 그저 내가 어떤 논리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뿐이다. 이 글의 목적이 설득에 있었다면, 나는 당신을 납득시키기 위한 예를 추가로 짚어가며 주장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설명하고 싶었다. 내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나는 왜 당신에게 이것을 설명하고 싶었을까? 이는 곧 글의 주제이기도 한데,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도 이미 외롭거나, 필연적으로 외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7. 필연적인 외로움에 관하여


세계가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감옥에 갇혔구나 싶었다. 그것도 독방에 말이다.

이 주관의 독방에는 내가 아닌 어느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내 수명이 다하기 전까진 나갈 수도 없다.


다행히 심심하지는 않다.

이 독방의 크기는 살아갈 날에 비례하여 계속 넓어질 것이고, 방 내부는 언제나 온갖 그림자들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들은 마치 진짜처럼 생생하고 흥미로우며, 재밌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 좋은 걸 나 혼자 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광경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옆 방에 갇힌 사람에게 내 방에 비친 꽃과 구름의 그림자가 너의 방에도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단다! 나는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꽃은 풍성한 나무와 같고 구름은 말풍선 모양인 것이 재밌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꽃은 풍성하다기보단 날렵한 나무의 모양이고, 구름은 뇌운인데 어디가 말풍선이냐 한다. 좀 모자란 사람인가?

다른 방에 갇힌 사람들에게도 얘기를 해보았다. 모두 꽃과 구름의 그림자를 보았다면서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진짜 재밌는 다른 그림자에 대해서도 설명했는데, 그런 게 어디 있느냐 따진다.

나는 답답했다. 대체 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아마도 내가 설명을 잘 못하나 보다 하고 아쉬워했다.


얼마지 않아 저들의 독방에 채워진 그림자가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단절됐구나. 아무도 나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없구나.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내가 설명하지 않는 한 외부에서 절대 알 수가 없겠구나.

고립됐구나. 아무도 나의 세계에 찾아올 수 없구나. 나는 평생 이 세계에 혼자 갇혀있겠구나.

필연적이구나.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 독방에 그저 던져졌을 뿐이며, 뇌를 가진 존재인 한 절대로 탈출할 수 없구나. 나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혼자만 아는 이 세계를 그저 살아갈 뿐이겠구나.


이윽고 외로움이 찾아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외로움이란 존재론적 외로움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체감의 부재이자, 자신이 세계에 홀로 존재하는 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끼게 되는 결핍감이다. 여기서 결핍의 대상은 타인이다. 처음부터 일체감을 몰랐다면 외로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반드시 보호자의 세계로부터 탄생하게 되므로 일체감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외로움 또한 필연적이다.


외로움 즉, 타인의 결핍이란 어떤 느낌인가? 일체감의 경우에도 그러했듯 이 또한 사람마다 그 수준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성이 완성된 이후에 겪게 되는 감정이기 때문에 보다 복합적이다. 따라서 그 종류까지 다를 수 있다. 어떤 이에게 외로움은 쓸쓸함일 수 있고 두려움이거나 안도감일 수 있으며, 그 모든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에도 복합적인 감정이 일었으나, 그중에서도 공허함이 가장 컸다.


세계의 본질을 깨달았을 때, 그래서 외로움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나는 공허했다. 이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평생 나밖에 없다면 세계의 시작과 끝, 그 모든 역사가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곧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나의 본질과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존재를 타인에게 주장할 수 있는지까지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마침 양자역학을 언급하게 되었으니 말이지만,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세계는 관측되어야만 실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세계는, 내 머릿속은 내가 아닌 누구에게도 관측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타인에게 내 세계와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나의 본질이 실재한다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 세계의 유일한 존재인 나는 관측자가 아니라 고양이지 않겠냐는 말이다. 갑자기 고양이가 나와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내가 느꼈던 공허함과 그 실존적 위협을 조금 더 쉽게 설명해 보겠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느 섬에 마을이 있었다고 하자. 그들의 역사는 어느 날 시작되었고 어느 날 끝났다. 그들은 섬을 벗어난 적이 없으며, 그 어떤 기록이나 유물도 남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들이 실존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 땅 위의 모든 지성체가 그 섬의 존재조차 모르며, 그 섬을 찾아내더라도 기록이나 유물이 없으므로 마을의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을 텐데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운명이 섬마을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껍데기가 살아온 역사야 몇몇에게는 알려질지 모르겠으나, 나의 세계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의 본질과 내 세계의 역사를 증명할 수 없으므로 나의 실존 또한 주장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나는 여기에 있다며 억지 부리는 것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것이다.




8. 나는 소설을 쓰려는 것이다


세계란 나의 뇌가 그려낸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그림자 세계는 고립되었으며 단절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나에게 외로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곧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타인에게 나의 본질과 세계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은 무엇인가?

그래서 실존적 위협을 이겨내고 공허함을 해소하여 존재론적 외로움까지 극복할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이 해답이 될지 아직 알 수 없으나, 나는 세 가지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하나는 아주 능동적인 해법이다. 이 독방 속에 가치 있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증거를 직접 만들어내는 것이다. 외부 세계에 아주 유용할만한 무언가가 나의 독방에서 생산된다면, 타인은 이 세계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산물의 독창성이야말로 나와 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방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다소 수동적인 해법이다. 이 독방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로 기록하는 것이다. 나는 일종의 소설을 쓰겠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소설이 있는가? 나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아주 좋아했다. 어릴 적 신간이 나올 때마다 열몇 번씩은 읽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주인공의 유년기나 가족관계, 그가 매일 겪었던 분한 일들과 기뻤던 일까지 모조리 꿰고 있었다. 그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의 입장에서 그의 세계를 살았으며, 책에서 묘사되지 않은 돌발 상황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할지까지도 추측할 수 있었다. 그가 힘든 인생을 이겨내고 결국 행복해졌을 때는 마치 나의 일처럼 기뻐했다.


아시다시피 소설이란 꾸며낸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가? 세계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깨달은 사람들은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그 세계의 역사를 생생하게 알고 있다. 마치 실제 위인들의 역사를 알고 있듯, 등장인물들이 어떤 인생을 살았으며 어떤 성과를 남겼는지 모두 꿰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면 이 질문에 한 번 대답해 보라. 수백 년이 지난 뒤, 해리포터의 이야기가 사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 의해 밝혀졌다. 이제 당신은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그렇다. 나도 이것이 궤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소설 속 세계가 실존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세계를 타인에게 알리는 방법이란 소설을 읽히는 것과 같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나의 세계란 타인의 관점에서 소설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실제의 일인지 아닌지는 오직 작가만 알 수 있다. 물론 시비를 다툴 방법이야 있겠으나 기껏해야 고증에 충실했냐의 수준까지다.


나의 관점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면, 당신은 소설이라는 매체가 세계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당신이 처음 만난 타인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설명해 본 경험이 있다면, 이 전달 기능의 우수성에 경탄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생판 모르는 남의 세계를 이렇게까지 잘 이해시킬 수 있을까. 아니, 이해시키는 것을 넘어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


지금 이 글도 마찬가지다. 나는 당신에게 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설명했다. 물론 아직은 내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신을 제대로 이해시켰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 다른 수단보다는 효과적으로 나의 세계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긴 이야기를 만나 대화로 전달했더라면 당신은 지루해 견디지 못했을 것이고, 다음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려는 것이다.

나는 독방 속 이야기를 써내리기로 결심했으며, 당신의 입장에선 재미없는 소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주 긴 글을 통해 도달한 결론이 시시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과 내가 필연적으로 겪게 될 존재론적 외로움에 대한 반작용이다. 이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당신의 해법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이것을 설명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내 세계가 실존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을 시작해야만 했다.


지금 외로움을 겪고 있는 당신에게도,

아직 외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한 누군가에게도 나쁘지 않은 참고가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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