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과 전가보다는 화해와 연결을 위한 사회
2019년 개봉한 영화 그린북에서는 이탈리안계 백인 꼰대 아저씨 '토니 발레롱가'와 흑인 성소수자 피아니스트 '돈 셜리'의 가슴 따뜻한 우정을 그리고 있다. 꼰대와 성소수자의 우정이라니? 가능한 일인가 싶은 이야기지만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돈 셜리는 미 전역 피아노 연주 투어 중 여러차례 곤경에 처한다. 한번은 바에서 백인에게 집단린치를, 한번은 동성애를 이유를 경찰서 유치장 철창에 갇힌다. 그럴때마다 슈퍼맨처럼 나타나 불량배들을 제압하고 경찰관들에게 그 특유의 떠벌이 기질을 잔뜩 선보이며 모두의 긴장감을 내려놓게 만든다.
꼰대와 아저씨. 꼰대는 명확하게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들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쓰이며 아저씨 역시 '아줌마'와 같이 쓰는 늬앙스에 따라 비하적인 의미로 여럿 쓰이고 있다. (개저씨 등의 다양한 응용표현까지 있다)
만약 돈셜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토니에게 꼰대아저씨라고 그를 무시하고 폄하했다면 크리스마스 이브 그는 토니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따뜻한 크리스마스파티에 함께 하지 못했을 것이다. 꼰대이자 아저씨였던 토니 발레롱가는 누군가의 다정한 남편이자 아이들의 존경받는 아버지, 생계를 책임지는 동료들의 든든한 노동자이기도 했다. 꼰대 아저씨로만 그의 삶을 조망한다면 그의 삶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언론과 청년정치인들이 이 두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의문점이 들 때가 있다. 걸핏하면 86세대는 꼰대다, 아저씨들은 20대의 삶을 모른다, 이 모든 불평등의 원인은 꼰대 아저씨들이 만들었다 등의 담론들이 쉽게 나온다. 물론 젊은 세대와의 세대 간극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어떤 세대의 차이를 함몰한 채 젊은 층의 관점에서 모든 행위들을 꼰대짓으로 바라보는 것도 일종의 세대 공격이라고 생각한다.
청년정치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점은 꼰대와 아저씨라는 단어를 통해 기성세대의 간극을 넓히는 자극을 조금 줄였으면 하는 점이다. 당신과 함께 정치를 하고 있는 수많은 동료들 역시 어떨 때는 꼰대 아저씨처럼 보이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풍부한 경험과 연륜으로 꽉막힌 시야를 통크게 넓혀주는 좋은 멘토가 될 때도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라는 인격과 품성을 꼰대라는 단어하나로 획일화시키는 것은 꽤 잔혹한 일 아니겠는가?
나에게는 존경하는 수많은 꼰대아저씨들이 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 나를 성장시켜준 회사의 대표님, 이사님, 그리고 지역에서 함께 하는 수많은 선배님들. 가끔씩은 꼰대같은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조언과 사랑을 베풀어주신 분들이다. 나는 그 분들의 좋은 점을 본받아 자양분삼고 더 섬세하게 다듬어 내 후배님들과 함께 이 세상을 조금은 더 아름답게 살아보고 싶다.
PS : 이 영화는 모든 관계에서 권력이 존재한다 믿는 분들이 꼭 한번 봤으면 좋겠다. 백인이자 남성에 나이권력까지 가진 아저씨와 흑인이자 성소수자인 예술가의 우정을 통해 반드시 그 모든 것들이 권력으로 치환되지 않는다는 점과 모든 사람들은 화해를 통해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다. (자체평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