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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st in Translation Feb 22. 2020

샤론 최가 밝히는 '기생충' 수상 시즌

Sharon Choi, 2020년 2월 18일, 버라이어티


센세이셔널한 작품 [기생충]을 가지고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 곁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모습을 보인 이후로 통역가인 샤론 최는 명실상부 이번 어워드 시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MVP)로 각광받았다. 어두운 색깔의 간소한 복장 차림을 한 채 언제나 공책을 움켜쥐었던 이 조용한 영화 전공 학생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화려한 연단에 연거푸 올라와 봉준호 감독이 말한 감사 가득한 메시지를 대신 전해주었다. 그간 있었던 수백 건의 인터뷰 요청을 마다한 그녀이지만, 지난해 4월에 있었던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되었고, 약 2주 전에 돌비 극장에서 아카데미 작품상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것까지, 장장 10개월에 걸친 여정을 우리 [버라이어티]에게만 공유해주었다.




모처럼 오래간만에 고요한 정적만이 남아 있다. 6개의 오스카 트로피로 마감된, 하지만 놀랍게도 노래방 뒷풀이는 없었던, 역사적인 그날 밤에 이루어진 눈물 어린 작별로 인해서 나의 두 눈은 여전히 부어 있는 상태다. 그때는 이미 잠을 청하기가 매우 늦은 시각이어서, 나는 일출을 보고 싶다는 희망 하나만을 품은 채 근처 해변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영화 [기생충]의 우주적인 승리가 태양으로 하여금 서쪽 하늘로부터 떠오르게 만들었다고 할까나. 하지만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햇살을 지켜보는 것 대신, 나는 전날 비로 인해 회색빛으로 붓칠된 하늘 저편에 달이 희미하게 사라지는 걸 보게 되었다. 우리가 오스카 시상식으로 가던 도중에 하늘은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스프린터 버스 외관을 세차게 부딪히자 우리 일행은 불안한 감정을 억누르고자 노력했다. 빗방울은 좋은 징조였다. 왜냐하면 영화 [기생충]은 비가 나오는 영화니까.


나의 목소리를 온전히 지키고자 끊임없이 주문했던 하니레몬티와 더불어 희소식과 새로운 도시들, 그리고 마이크로 점철된 지난 6개월은 이제 희미해져 갔다. 관객들을 이곳 저곳 만나게 되면서 나는 이 특별한 영화를 봤다는 흥분에 눈빛이 초롱초롱해진 수백명의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 그저 내가 대학 시절에 기획한 야간 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들을 연출한 남성과 손 세정제를 같이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조리함으로 뒤죽박죽 엉켜진 순간들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초단편 영화만을 만들었던 나는 어느새 할리우드 중심부로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올해 1월 쯤에 나는 바다 가까이 머물기로 결정했는데, 엄청난 시상 레이스가 끝나면 확연히 찾아올 우울감에 맞서 넓은 대양에 안전망을 구축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2019년 4월에 나는 봉준호 감독의 전화 인터뷰 통역을 맡아달라는 다급한 메일을 받았다. 파일럿 작품 대본 화면의 깜빡거리는 커서만을 오로지 쳐다보는 소위 '크런치(갈아넣기) 모드'로 밤을 지새운 나머지 나는 그 인터뷰를 놓쳤다. 내 안의 모든 전문가스러운 기질을 동원해서 문장 끝 느낌표들을 삭제한 후 답변했다. "추후 통역은 가능하오니 혹시 나중에라도 알려주세요." 그로부터 며칠 후, 또 다른 통역 요청이 들어왔고, 나는 방광이 한 시간 가량 버텨주기를 기도하면서 메모지와 펜을 가지고 의자에 앉았다. 그 전까지의 통역 이력은 고작 1주일에 불과했고, 이창동 감독의 저평가된 걸작 [버닝]과 관련된 게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추후 인터뷰 통역 도중 봉준호 감독이 언급한 영화 레퍼런스를 잠깐 놓쳤을 때, 내가 아닌 다른 통역사가 앞으로 화장실을 두려워 할 기회를 얻을 거라고 확신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옥자]에서 배우 스티븐 연의 팔뚝을 대신 빌려 "통역은 신성하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한 건 칸 영화제의 통역을 의뢰받았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나는 방학을 맞아 영화제 기간 동안 프랑스 남부에 지낼 계획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광경을 목격하러 가는 길에 비즈니스 정장으로 가득찬 백팩을 끌고 다닐 줄 알았더라면, 나는 기내 반입 수화물 전용 항공편과 8인실 짜리의 호스텔 방을 예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 칸에서 영화 [기생충]이 처음으로 상연되었을 때, 뤼미에르 대극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모했다. 내가 태어난 한국을 다루었음에도,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를 본다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어릴 적 미국에서 2년 동안 살다 온 경험은 내 자신을 하나의 이상한 혼종(hybrid)로 탈바꿈시켰다. 미국인이 되기에는 너무나 한국적이고, 한국인이 되기에는 너무나 미국적이었다. 그렇다고 한국계 미국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영어의 끈을 놓치는 않았지만, 대학을 진학하고자 LA로 돌아갔을 때 지극히 캐주얼 한 인사인 "What's up?"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를 여전히 몰랐다. 그래서 주로 만나는 사람들과는 내 자신의 절반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각기 다른 문화를 하나의 영화에 담기란 너무나 벅찰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계를 손쉽게 돌파해버리는 이야기가 이곳에 있었다. 원래 나는 칸 영화제에서 영어권 언론 매체 담당으로 이틀 정도만 일을 할 예정이었지만, 결국 영화 [기생충]이 수상 후보작 이름에 홀로 남을 때까지 무대 뒤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내가 참여한 어워드 시즌의 나머지 이야기는 전부 유튜브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기실, 통역할 때면 추억에 잠길 여유 따위는 없다. 오롯이 지금 존재하는 이 순간들만 챙겨야 하며 다음 구절을 위한 머릿 속 공간을 만들어야 하므로 재빨리 각각의 기억을 지워야 한다. 불면증을 누그러뜨리고, 동서양 문화에 대한 나의 이해도를 유지하는 한편 봉준호 감독의 명료한 표현을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나는 내 평생 지켜 본 모든 영화들을 의지했다. 봉준호 감독의 배려로 나의 임무는 보다 원활하게 이뤄졌다. 특히 봉준호에 대하여 내가 리포트 쓴 적이 있었기에 일찌감히 영화감독 겸 사상가로서의 그의 언어가 친숙했던 게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가면 증후군(impostor syndrome)과 싸워야 했었고, 존경해오던 사람들 앞에서 소중한 분의 얘기를 잘못 전달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과도 맞서고 있었다. 무대 공포증을 이겨낼 방법은 백스테이지에서 10초 정도의 명상과 청중이 바라보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영화보다 더욱 사랑하는 매체는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우연히 들은 프랑스쪽 홍보담당자가 스트레스 받는 동료들에게 외친 한 마디를 계속 마음 속에 되새겼다. "그저 영화일 뿐이야!"


[기생충] 여정은 나에게 특권이었다. 코미디 듀오로 변모한 송강호와 봉준호의 포효하는 웃음소리, 미국배우조합상 시상식에서 앙상블 상 수상 이후 영화 [기생충] 출연진을 향한 기립박수, 그리고 아카데미 시상식 때 봉준호 감독이 마틴 스콜세이지에게 헌사를 보였을 때 관객들 위로 펼쳐진 금빛 기운을 직접 목격했다. 나만의 개인적인 영웅들도 볼 수 있었다. 나는 피비 월러 브릿지(Phoebe Waller-Bridge)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섹시한 신부님을 빈 적이 있었는데, 새해 첫 날에 그녀가 만든 드라마 속 가상의 벽(The Wall) 때문에 울게 되면서 소원이 성취되었다고 말했다. 타코 벨 매장에서 새벽 4시쯤에 나와 프랑스인 감독인 셀린 시아마(Celine Sciamma)는사랑과 연약함에 대해서 깊은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 몇 시간에 걸쳐 이야기와 다양성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인 후, 뒤편에서 "폐장 시간"을 알리는 배경음악이 들리자, 나는 룰루 왕(Lulu Wang)과 함께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존 캐머론 미첼(John Cameron Mitchell)에게는 당신의 작품 때문에 내가 영화 연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알렸다. 봉준호 감독은 내가 미첼을 얼마나 많이 선망하는지를 가지고 놀리곤 했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선물은 통역 일을 하면서 매일 보게되는 영화 [기생충] 배우 및 스태프들과 일대일로 친해지면서 개인적인 대화를 주고 받았다는 것이다. 다시 이런 분들과 일을 하게 될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앞으로 몇 년 간은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래도 좀 시간은 걸리겠지.



프랑스 칸 영화제가 끝난 후 미국 텔루라이드 영화제가 시작되기 전, 나는 스태프들이 훌륭하다는 것 빼고는 어느 프로덕션이든지 간에 겪게되는 모든 일상적인 어려움을 직면한 친구의 프로젝트 현장에서 깊은 혼돈에 허우적거린 적이 있었다. 우리가 조심스레 계획을 세워 촬영을 하기로 한 화장실이 아침부터 갑자기 공사에 들어거자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조감독으로서 나는 아픈 현장 어시스턴트를 장소 섭외로 인해 즉각 보내야만 했다. 촬영을 완료하고 3일 후에 나는 오스카 캠페인을 시작하고자 텔루레이드 행 비행기를 탑승했다. 갑자기 높아진 고도와 더불어 업계의 상층부 쪽으로 올라간다고 하니, 이를 조절해 줄 하나의 산소탱크가 나에게 필요했다. 내가 일부가 되어서 누렸던 실로 위대한 순간들이 있다고 하나, 학생 영화 현장이 나의 자리라는 걸 몸소 깨닫는다. 작은 규모의 진심 어린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려는 투쟁의 한 가운데 서서 나는 학생 영화 연장이 나의 자리임을 몸소 깨닫는다. 영화감독으로서 나의 목소리를 향상시키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결코 잊지 못할 이틀이 있다. 영화감독으로서 나는 봉준호 감독의 시선을 슬쩍 흘겨봤을 때 일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건축한 LA의 홀리훅 하우스에서 뉴욕 매거진과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그곳은 캘리포니아를 아름답게 헌사하는 공간 같았다. 봉준호 감독이 그곳을 직관적으로 읽어 내려가는 걸 들었는데, 마치 등장인물, 공간, 그리고 카메라의 삼위일체를 다루는 마스터클래스를 수강하는 느낌이었다. 어려움 없이 자신만의 시각을 공유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배우 조여정과 함께 W 매거진의 커버를 촬영할 때 더욱 도드라졌다. 언제나 유머와 재치가 감미된, 그만의 재빠르고 정확한 안목은 인상적이었고 유익했다. 다수의 훌륭한 나머지 아티스트들도 영화 [기생충]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작업에 임했다. 단 하루라도 그 현장을 가서 필기라도 할 수 있다면 나의 경험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내놓을텐데.


언어를 끊임없이 바꿔주는 일이 나의 직업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건 내가 아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지난 20년간 나는 내 자신의 통역사로 살아왔다.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아동을 연구한 심리학자가 어느날 나에게 인간의 뇌 용량에는 제한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단일언어 사용자가 1만개의 단어를 안다면, 이중언어 사용자는 각 언어의 단어를 5,000개씩밖에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평생 두 가지 언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다. 영화의 시각적 언어와 사랑에 빠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의 마음을 외부와 소통 가능한 언어로 치환한다는 점에서 영화 연출은 통역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원문과 최대한 가깝게 표현하는 단어를 찾고자 굳이 검색할 필요는 없었다.


그 심리학자는 또한 언어를 바꿔주는 일은 뇌의 언어 부분이 아닌 사고의 유연함을 통제하는 부분과 관련된다고 덧붙였다. 연습을 통해 단련할 수 있는 일종의 근육과 같다. 그리고 이 유연함이 영화 [기생충]을 작금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사고의 유연함은 공감과 이해를 향상시킨다. 공감은 영원한 타인들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수행한다. 덜 외로워지고 싶기에 나는 스토리텔러가 되고픈 마음이다. 이번 영화제 시즌과 관련된 작품을 나는 쓰지 않고 있다. 이건 내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련의 개인적인 경험이라서, 나의 이야기로 녹여낼 시간을 따로 찾아야 한다. 봉준호 감독이 인용한 마틴 스콜세이지의 진실된 구절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을 빗대어 나는 현재 한국을 배경으로 한 작은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나의 소셜 미디어 피드에 내 얼굴이 뜨는 건 참으로 기괴하다. 트위터 봇 계정들이 내 이름을 비아그라 광고의 해쉬태그와 묶어 업로드한 트윗을 보면 나의 명성이 15분밖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인지했다. 심지어 뷰티 광고 제안이 나에게 들어왔다는 얘기도 있다. 사람들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나에게까지 공유해줘서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2월 9일을 기생철의 날로 국가적으로 기린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는 않을 듯 싶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나날들이 빨리 끝났으면 하고, 만약 다음에 내 이름이 스팸 광고와 함께 트윗된다면, 오롯이 내가 만든 이야기 때문이라고 바라본다.


당분간 나와 노트북일 뿐이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자신과 영화의 언어를 통역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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