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요리책과 요리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어린 내 눈엔 멋지게 플레이팅 된 책 속의 근사한 외국음식들은 환상 속의 요리 같았고, TV에서 정갈하게 손질된 재료들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는 요리사들이 마법사처럼 보였다. 나도 저렇게 요리를 잘하는 어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초등 고학년 무렵엔 요리프로에서 본 요리를 내 맘대로 따라하다 망쳐서 엄마한테 등짝스매싱을 맞은 적도 많다. 등짝스매싱보다 아픈 것은 내가 만든 아니 망친 요리를 가족들 누구도 먹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맛이 없어도 맛있는 척 조금은 먹어주고 이런 도전을 한 게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셨더라면 하는 서운함이 있었지만 엄마가 되어보니 아이의 저지레를 치우는 엄마의 힘듦도 이해한다.
요리를 하는 사람의 마음은 정성껏 만든 음식을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요리를 해본 사람들은 안다. 요리는 요리프로그램에서처럼 깨끗하게 손질이 다 된 재료들과 레시피대로 계량된 양념으로 휘리릭 조리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는 걸. 그건 최종단계에 불과하다. 요리를 하려면, 먹을 사람들의 입맛을 고려해 메뉴를 정하고 더 맛있는 레시피가 있나 검색해보고 재료를 사와서 씻고 손질해야 한다. 콩이나 미역같은 마른 재료들은 물에 불려두고 채소는 껍질을 벗기고 못먹는 부분은 떼어내고 고기는 지방과 힘줄을 제거하는 등 밑작업을 거쳐야 한다. 요리 중간중간 사용한 그릇과 조리도구도 정리해야 하고 남은 재료는 소분해서 냉장고에 넣어둬야 한다. (밀키트가 각광받는 이유는 이런 귀찮은 사전작업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길게 썼지만 요약하자면 요리는 시간과 품이 드는 귀찮은 일이라는 것이다. 특히, 가끔 하는 이벤트성 요리가 아니라 매끼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코로나 돌밥시절의 슬픈 기억이 떠오른다.) "저녁에 뭐해먹을거야?" "요새 뭐 해먹어?" 어릴 때,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이랑 맨날 하시던 말씀인데 이젠 내가 그러고 있다. 집에 있는 재료들을 체크해서 기껏 저녁메뉴를 정했지만 재료 손질할 생각하니 귀찮아서 배달앱을 켠 날도 부지기수다.
같은 재료로 같은 음식을 해도 일정한 맛을 내는 건 어렵다. 맛있게 되는 날도 있지만 '이 맛이 아닌데?' 싶은 날도 있다. 새로운 요리에 도전할 때는 가족들이 어떤 평가를 할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공들여 만들었는데 손이 가지 않아 남은 음식들을 보는 것만큼 속상한게 없다. 남은 음식을 버리기도 아까워서 냉장고에 넣어뒀다 혼자 먹을 때의 씁쓸한 기분은 요리를 안해본 사람들은 모른다. '맛없으면 안먹을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요알못(요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 일 확률이 크다. 요알못들은 요리를 만드는 길고 힘든 과정을 모르니까.
코로나 시기에 요리에 취미를 붙이신 시아버님은 우리 가족이 갈 때마다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고 직접 만드신 식빵, 잼, 레몬청, 호두정과 같은 간식거리도 싸주신다. 난 먹는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요리를 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기에 방청객처럼 리액션을 하며 배가 부른데도 무리해서 먹곤 하는데 그럴 때 아버님께서 맛있어? 하면서 웃으시면 참 기분이 좋다. 반면, 소식좌이자 새로운 음식 싫어하고 늘 먹던 음식만 먹는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인 나의 남의 편은 대놓고 솔직한 평가를 한다. 이건 달다. 이건 짜다. 배불러서 못먹겠다. 입에 안맞는다는 등의 평을 하고 냉정하게 돌아선다. 한번은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솔직한 평가를 해줘야 발전을 한다나. (서바이벌 요리프로그램 나왔니? 고든 램지세요?)
내가 만든 요리가 외면받을 때면 나는 요똥(요리똥손)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요리라고는 라면 밖에 못 끓이는 그런 사람. 그래서 요리를 하는 사람의 노고는 전혀 모르고 누가 해주는 음식을 먹기만 하는 사람, 요리를 안해도 되는 사람. 하지만 요똥이 된다해도 맛없다고 안먹고 대놓고 맛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되지 않을 테다. 그건 자기가 먹을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돈내고 먹는 식당이라면 몰라도 본인을 위해 음식을 해준 가족이나 지인의 수고로움을 생각한다면 짜네, 싱겁네 타박하지말고 왠만하면 맛있게 먹어주자. 사실 그 요리가 맛이 없는건 만든 사람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음식을 만들면서 맛을 보기 때문에 망쳤다는 걸 알고 이것저것 넣어보며 어떻게든 심폐소생해보려고 애쓴 결과물을 내놓고 노심초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날에도 맛있는 척 먹어주면 요리를 하는 사람은 감동받아 다음엔 더 정성스럽고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겠지만, 맛이 있네 없네 하며 안먹는다면 요리를 하고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내가 그랬다. 한동안 밀키트, 반찬가게, 배달음식을 애용하고 요리를 멀리한 적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적이 안나올 때도 있는데 거기다 공부 안한다고 뭐라고 하면 공부와는 멀어진다. 공부감정이 상하는 것이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나를 위해 누군가 음식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맛있게 먹어주자. 요리는 사랑이다. 누가 나에게 사랑을 준다면 짠 맛이든 단 맛이든 그 자체로 행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