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018/ <GQ KOREA>
산울림 1집 앨범은 1977년 12월에 나왔다. 이 앨범은 여전히 여름, 아직 뜨겁지만 멈춰 서서 뒤돌아보곤 하는 늦은 여름이다.
프런트 데스크를 지키는 사람은 프런트맨이라고 하지 않지만 밴드 리더는 프런트맨이라고 한다. ‘Front’와 그 파생어 ‘Frontier’ 등의 어원이 말해주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나뉘는 경계의 처음을 앞이라 규정한다는 것이고, 밴드 프런트맨에게는 앞에 나서는 것 이상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김창완은 산울림의 프런트맨이다. 하지만 40년의 시간을 거쳐 지금, 김창완이라는 이름은 산울림보다 크다. 모든 세대에게 제각각의 김창완이 있다. 1964년생 영화배우 한석규는 “‘아니 벌써’의 충격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70년대생들은 8집으로 대표되는 서정적인 포크 곡들과 함께 사춘기를 보냈다. 80년대생들은 산울림의 동요를 듣고 자라 김창완의 연기를 보다가 90년대 서구 록 음악의 경향 속에서 산울림의 음악을 뒤늦게 깨닫는 식이었다. 90년대생들에게는 <요정 컴미>의 순박한 아저씨부터 <하얀 거탑>의 표독한 권력가에 이르는 중견 배우로서의 인상이 강하다. 이 모두가 김창완이지만 으레 종이라고 하고 하얀 종이라고 하지 않듯이 지나친 게 있다. 산울림은 삼 형제의 밴드고, 김창완은 형-프런트맨이다.
어느 날 ‘형’이 통기타를 한 대 사서 집에 왔다. 삼 형제의 둘째이자 산울림의 베이시스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창훈은 말한다. “처음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몇 달을 기타만 잡더니 그럴듯하게 치더라고요. 멋있었죠. 그래서 어느 날 저도 쳐봤어요. 음악 시간에 배운 거 있죠? A코드는 으뜸음이 뭐고 하는. 그 정도 지식만 갖고 눌러봤는데 딱 맞는 거예요! 코드 몇 개로 반주가 가능한 거예요! 얼마나 신기해요. 바로 곡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1집 앨범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산울림의 이름은 무이 無異였고, 그 이름과 달리 여느 밴드와는 사뭇 다르게 시작한다. 다른 아티스트의 노래를 카피하고 연습하는 일련의 수련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기타를 사자마자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하는 기분으로 D코드만 30분을” 쳤던 김창완은 화음에 완전히 매혹되었던 것 같다. 창작곡으로 기성세대, 제도권과 각을 세우겠다는 자의식이 있었다는 점에서 ‘펑크’와 유사한 태도를 유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음악은 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설명이 가장 가까워 보인다. 유명 뮤지션보다, 음악 사조보다 ‘우리’가 가까웠다.
자작곡으로 시작했다는 사실로부터, 산울림 1집을 세 명의 순수한 청춘이 빚어낸 걸작이라 일컫는 것은, “우리는 모르는 것 자체를 즐겼다”는 그의 말처럼 딱히 틀리지 않다. 하지만 청춘과 순수에 기대 설명하면 산울림 1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열망과 지적인 접근은 부득이하게 축소된다. 그리고 그것은 데뷔 이전 6년 동안 매주 “음악놀이”를 거쳐서 이미 1백 곡을 만들고 연습하고 다듬어온 밴드에게 ‘치기’를 미덕이라고 말하는 실례이기도 하다.
김창훈에게 그 시절의 “음악놀이” 시간은 아직도 하나의 기준이다. “그때의 순수한 에너지는 아마 평생 회복이 안 될 거예요. 가끔 좋은 곡을 완성했을 때 느끼는 희열과 비슷하지만, 멤버 전부가 완전히 합의된 음악, 그 순수한 밴드 음악의 기쁨은 앞으로 불가능해요.” 삼 형제의 음악놀이는 “형이 그로부터 한 육 개월 뒤 오백원짜리 통기타를 하나 더” 사면서 시작된다. “71년 가을일 거예요. 그걸 내가 치고, 막내 심심하니까 드럼 채 하나 사서 사전을 베이스 드럼으로, 얇은 공책을 스네어로, 숟가락 통을 심벌즈로 쓰라고 하고 같이 놀았어요.”
가난한 형제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도 찾아왔다. 김창훈이 대학에 입학하면 어머니가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했다. 김창완과 김창훈이 다른 조건을 내밀었다. 피아노 대신 기타, 베이스, 앰프, 드럼이었다. 30만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드는 일이었지만 부모님 기대대로 척척 국립대에 입학하고, 음악을 통해 가깝고 돈독하게 지내는 형제였으니 무리가 무리만은 아니었을 테다.
하지만 모든 밴드가 그렇듯 악기까지는 어떻게 장만해도 합주실은 요원했다. 산울림은 방 안에 달걀판을 덕지덕지 붙이는 것으로 집을 합주실 삼았다. 그 시절의 흑석동은 담벼락이 무의미할 만큼 집과 집이 바싹 붙어 있었다. 김창훈의 표현에 따르면, “옆집이라기보다 옆방”이었다. 어머니를 통해 동네 주민들의 항의가 들어오는 것 같긴 했는데, 이상할 만큼 아무도 직접 꾸짖지 않았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지혜롭게 막아낸 것이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이 너그럽기도 했던 것이라고 그는 짐작한다. 골목에 놓인 평상에 모두 나와 여름밤을 함께 보내던 시절. “밤만 피하면 원 없이 연습할 수 있었어요. 집이니까 조용히 연주하자, 이런 게 없었거든요? 정말 합주실 부럽지 않았죠.”
하지만 김창훈은 다른 면에서 갈증을 느꼈다. 형이 기타를 치니까 자신은 베이스를 잡았지만 선명한 기타 연주에 비해 베이스 연주는 모호한 데가 있었다. 자신만의 새로운 베이스 연주에 대한 자부심과 별개로 진짜 밴드는 베이스 연주를 어떻게 하는지 한번 듣고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소속 음악 동아리 ‘샌드 페블즈’에 들어간다.
막상 선배들이 바빠 뭘 배울 기회는 없었으나 동아리 소속으로서의 의무는 있었다. 3학년이 되면 2학년이 밴드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매니저 역할을 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대학가요제>가 처음으로 열린 77년이 김창훈의 3학년이었다. 2학년들에게 여기 한번 나가보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노래가 없어서 못 나간다는 답이 돌아왔고 자신의 곡이 있다며 들려줬다. ‘나 어떡해’였다.
무이(산울림)는 무이대로 <대학가요제>에 참가해 예선을 1등으로 통과했지만 김창완이 이미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이 석연치 않았다. 주최 측에 문의한 결과 출전 불가였다. 아쉬움을 삼키며 다른 기회를 엿보려던 차 고무적인 일이 일어났다. 샌드 페블즈가 <제1회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했다.
김창훈이 설명했다. “‘나 어떡해’는 산울림 노래 중에 그리 혁신적인 곡이 아니었어요. 대중성은 있을지 몰라도 ‘소소’, ‘애버리지’랄까. 우리 노래 중에 그리 우수하지도 않은 곡이 대상을 탄 거야! 형이랑 내가 어떤 생각이 들었겠어요?” “더 높은 곳에 도전해볼 만하다”가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질문의 답이겠지만, 산울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헛된 걸 하지는 않았구나. 그러면 취직하기 전에 기념 앨범이나 하나 만들자.’ 산울림 1집의 시작이다.
산울림 1집의 문을 여는 곡, 이 앨범을 대표하는 곡은 ‘아니 벌써’다. 시인이자 방송인 김갑수는 한 방송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열아홉 살쯤이었을 거예요. 사방에서 ‘아니 벌써’가 나오는데 애들마다 그러는 거죠. “히- 너 들어봤냐?” 너무 이상했던 거예요, 노래가. 새로운 히트곡이 나오면 그 곡 좋다고 말할 때의 반응이 있잖아요.” 그럴 만도 했다. ‘아니 벌써’는 제목은 물론이고 가사에 쓸 거라고도 상상해보지 못한 말이었다. 노래 가사로 쓰기 좋은 관용구이긴 하지만 그 어조가 너무 강하고 당시 대중가요 가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에 이어질 수 있는 생각이나 감정이 비음악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활기찬 아침을 묘사하기 위해 ‘아니 벌써’라고 말하면서 시작하는 문맥도 이상했다. 그런데 그 1집 앨범이 2주 동안 40만 장 판매됐다.
1977년은 유신정권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때였다. 뿐만 아니라 1975년, 일명 ‘대마초 파동’으로 50명이 넘는 가수, 작곡가, 연주자, 배우, 코미디언이 구속, 불구속된 이후기도 하다. 한국 대중음악이 번안곡과 경음악의 시대에서 창작곡과 앨범의 시대로 변모해가던 때 터진 이 사건으로 한국 대중음악사는 맥이 끊긴 정도가 아니라 과거로 회귀한다.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사전심의를 강화하고 모든 음반에 건전가요를 의무 삽입시킨 시대, 어른을 위한 대중음악의 시대가 흐르고 있었다.
많은 음악가가 안전하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트로트 음악가로 전향했다. 젊은이들은 도무지 들을 게 없는 가요 대신 팝송을 들었다. 한 나라의 대중음악이 모국어를 모국어로 체화하는 경험을, 그 세대의 문법으로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갈증으로 가득한 세대였다. ‘아침이슬’의 금지곡 사유를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에서 ‘긴 밤’이 1970년대 유신정권을 뜻한다고 밝힐 때였다. 인공조명으로라도 낮이어야 했다.
“아니 벌써 밤이 깊었나 / 이 친구 벌써 취했나.” 김창훈이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 벌써’의 원래 가사다. 새마을 운동가와 다를 바 없는 내용의 그 가사(“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 창문 밖이 훤하게 밝았네”와 정반대다. (또 하나의 예로 이 앨범의 B면 세 번째 곡 ‘소녀’의 제목은 원래 ‘늑대’였다.) 오늘밤 술 마시고 죽자는 노래가 심의에 의해 새 아침을 맞이하자는 노래로 둔갑했다. 그럼에도 이채로운 것은 “노랫말을 먼저 쓰고 작곡을 하는 작법”에 의해 탄생했기에 “아니 벌써”라는 구절만은 버려지지 않은 것이다.
강한 부정문이지만 가사의 문맥 속에서 그리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경쾌하고 밝은 노래로 받아들였던 배경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바다가 없지 않은 것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곡, 한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아름다운 노래 중 하나일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는 이렇게 시작한다. “꼭 그렇진 않았지만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어.” 연이은 부정. 첫 곡이 당대의 맥락 속에서 사회적인 부정으로 들린다면 두 번째 곡은 음악, 구체적으로는 대중가요 가사에 관한 부정처럼 들린다. 대중가요 가사의 명백한 과장과 선명한 지시성, 극단적인 감상성 그리고 딱 떨어지는 글자수와 함께 흘러가는 그 운율을 비웃는 듯하달까. 기념 앨범이니까 기념사진 하나 남기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비록 기념 앨범이지만 나는 새로운 것을 하겠다는 자존으로 우뚝한 사람이 있다.
1집을 제작한 이흥주 사장은 서라벌레코드의 문예부장이자 1집의 프로듀서였던 방기남에게 엄명을 내렸다고 전한다. “얘네 음악은 절대 터치하지 마. 얘네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야 돼.” 그의 믿음이 어떻게 그렇게 절대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새롭고 신선한 음악과 가사가 있었지만, 그것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뿐더러 이 음악에는 지금으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김창완은 “집에서 84번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다”는 이유로 서라벌레코드에 직접 방문해 데모 테이프를 건넨다. 약 일주일이 지나 녹음하자는 연락이 왔다. 김창훈이 설명했다. “녹음하려면 그때 한 이삼백만원 들었을 거예요. 엄청나게 큰돈이죠. 어떻게든 자비로 하려고 했는데 돈 낼 필요 없다고, 그냥 해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무슨 횡재냐, 이렇게 된 거죠. 계약서고 뭐고 바로 녹음했어요.”
첫 녹음은 10월이었다. 먼저 한 프로(3시간30분)를 쓰고 있는데 엔지니어가 녹음을 중단하더니 악기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김창훈은 “국산 C급 베이스기타”를, 김창완은 “필리핀 밴드가 사용하다 버리고 간 것을 주워서” 쓰고 있었다. 녹음하러 오면서 이런 악기를 들고 오는 사람들이 어딨느냐고 황당해했다. “그래서 샌드 페블즈의 아는 형을 통해 수소문해서 음악평론가 이백천 씨한테 펜더 같은 악기를 빌렸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스튜디오가 얼마나 비싼지 아냐고, 1초에 1백원이라고 프로듀서가 겁을 줬어요.(77년 당시 서울 시내 자장면 평균 가격이 2백원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정말 열심히 했죠.” 그다음 한 프로로 녹음이 끝났다.
당시 김창완은 구직 활동 중이었고, 녹음 당일 은행 면접이 잡혀 있었다. “취직 시험이야 그다음에라도 찬스가 있는데 레코딩은 평생 한 번 있을 일 같아서” 스튜디오로 향했다. 앨범이 12월에 나왔으니, 서라벌 레코드로부터 연락을 받고 앨범이 나오기까지 겨우 두 달이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형제끼리 맞춰온 곡들이라지만 안 그래도 열악한 당시 한국의 스튜디오 환경, 스튜디오 녹음 경험이 전무한 밴드를 감안할 때 매우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의견을 교환하고 시행착오를 거쳐 좋은 그림을 만들어간 게 아닌 가장 빠른 해결책을 찾은 장면들, 이 앨범이 이상한 원인들이 눈에 띈다. 곡의 주도권을 상당히 크게 갖고 있는, 하지만 다른 악기에 비해 너무 기계적으로 연주되고 있는 오르간은 클래식 교육을 받은 사촌동생 김난숙에게 악보를 그려주고 시킨 것이다. 김창완이 “필이라고는 없는 연주”였다고 일갈한 바 있다. 밴드는 “AC/DC 같은 사운드”를 원했지만, “보컬을 키워야 라디오에서 잘 들린다”는 엔지니어의 말에 연주의 비중은 줄 수밖에 없었고, 기타 퍼즈 사운드에 대한 이해나 기술이 있었을 리 만무한 엔지니어는 힘차게 찌그러진다기보다 잡음처럼 엥엥대는 록 밴드의 기타 퍼즈 소리를 만들고 말았다. 좋을 게 없는 외부적 조건이었지만 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도 산울림의 음악론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짐작하건대 이 앨범은 이 중심 속에서 이상하고도 훌륭해진다.
산울림과 김창완 밴드에서 함께 연주했던 하세가와 요헤이(양평이 형)가 1집 앨범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산울림 첫 합주를 할 때예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인트로를 저는 E마이너로 알고 있었거든요. 근데 선생님이 E메이저로 치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연주해보니까 정말 E메이저가 맞아요. E메이저로 쳐야 음악이 살아나요. 이상해서 나중에 음반을 천천히 들어보니까 그게 악기마다 다른 거예요. 그 노래에서 오르간은 마이너를 연주해요.” 그는 이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느낌으로 보는 눈이 있으시더라고요.”
산울림은 당시 한국의 기성 음악을 거의 알지 못했지만 자신들의 음악이 어떤 것인가는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당대에 산울림의 과거 음악을 재발견하는 관점을 제공하고 최근 김창완과의 흥미로운 대담을 진행한 바 있는 프로듀서이자 디제이 소울스케이프는 이렇게 설명했다. “대담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장르라는 게 참 달콤한 유혹이라고요. 산울림은 장르에 취하지 않은 록이랄까요. 정형성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레프트필드’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1집은 그보다는 순수성이라는 관점에서, 여기에서만 가능한 로컬 뮤직인 거죠.”
실제로 삼 형제가 합의한 ‘좋은 음악’의 기준은 외부보다는 내부에 있었다. “1집에 넣을 곡은 기존에 없던 곡, 반항적이고 파괴적인 곡을 기준으로 삼았어요. 이미 히트한 ‘나 어떡해’를 넣는 건 아주 쉬운 선택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죠. 산울림의 데뷔가 그 노래로 희석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삼 형제가 모여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토론도 필요 없이 완성까지 흘러갔어요.” 김창훈이 말했다. 수록곡 길이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1집의 성공으로 2집과 3집에서 더 극단적인 시도를 했지만) 한국적인 록을 ‘실험’한 ‘청자’가 8분에 이르는 건 그렇다 쳐도 크게 히트한 ‘아니 벌써’조차 키보드와 기타 솔로를 지나 노래가 끝난 뒤에도 1분 이상 연주를 잇다 5분 36초에 끝낸다. 산울림은 실체를 모르는 대중들을 향해 허리를 숙이기보다 자신들의 음악에 집중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긴 시간을 들여 구하는 동의였다.
비단 1집의 시간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의 진보를 믿는 음악가에게도 한국의 상황은 어느 시대나 한계 투성이였고, 이 상황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문장으로 바꿔놓는 것은 음악가가 음악을 향유하고 사색하고 연주하는 긴 시간이었다. 그런데 김창완의 음악 경력 중 정형화된 음악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밖의 음악들을 ‘순수한’, ‘재미있는’, ‘독특한’이 아닌 질문으로 곱씹은 사례가 있었나. 음악가가 경계선 맨 앞에 서 있는데 청자와 매체가 너무 멀찍이 서서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크게 보면 산울림 1집부터 3집까지가 기나긴 산울림의 역사에서 하나의 묶음이다. 데뷔 전에 써놨던 곡들로 온전히 채운 앨범들이고, 시기적으로도 두 동생이 군에 입대하기 전, 1집 발매 후 불과 1년 안에 낸 세 장의 앨범이니까. 2집과 3집을 거치며 야심과 실력과 외부적인 환경은 더 커지고 더 좋아졌고, 따라서 음악적인 평가도 더 높게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2, 3집의 완성도가 더 높다는 점 이상으로 1집의 한 몸과 같은 이 앨범들에 비해 1집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나, 그런데 그 한계를 삼 형제가 어떻게 넘어섰나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김창훈이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1집이 히트하는 걸 보고, 우리 삼 형제가 얼마나 바보였느냐면요, 바로 2집을 녹음했어요. 왜냐하면 그때 우리 삼 형제 목표가 뭐였는지 알아요? 세계 최초로 100집을 내는 거였어요. 얼마나 무궁무진하게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100집을 내자고 했겠어요.”
하지만 산울림은 13집에서 멈추고 말았다. 알려진 대로 지난 2008년 삼 형제의 막내이자 드러머 김창익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김창완은 “산울림은 가족 밴드다. 막내가 이렇게 떠나버린 이상 예정되어 있던 것 이상의 산울림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건 없을 것이다”라며 해체 의사를 밝혔다. 뜨거운 우애기도 하지만 산울림에게 삼 형제라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도 알 수 있다.
산울림 1집은 왜 미숙한데 부족하게 들리지 않나. 산울림 1집은 어떻게 새로운데 자연스러운가. 산울림 1집은 왜 낯선데 사람들이 열광했나. 산울림 1집은 유행가인데 어떻게 고전으로 남을 수 있었나. 이런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다 보면, 복잡하고도 현실적인 매듭까지 고려해서 풀어보려고 하면, 형제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자문에 도달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기보다 형제는 밴드보다 하나였다. 관계와 관점의 굴절과 곡절이 한층 단순했다. 김창훈이 ‘우리’에 힘을 줘서 말했다. “산울림 1집을 작업할 땐 너와 내가 없었어요. 그냥 우리죠. 그 앨범의 모든 면에서 형제 간의 질서와 패러다임이 작동했어요. 그게 어떤 것이라고 딱 꼬집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우리가 있었어요.”
이 글은 ‘프런트맨’을 만나지 못하고 작성했다. 김창완에게 수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이유는 듣지 못한 채 거절 의사만 전달 받았다. 주변의 수소문을 통해 언젠가부터 김창완이 인터뷰를 거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고 보면 산울림 데뷔 40주년을 맞은 지난해, 30주년과 달리 공연도 행사도 없었다. 프런트맨이 그 자리에 서고 싶지 않아 하는 중이다.
작년에 언론을 통해 들을 수 있었던 산울림의 유일한 소식은 <산울림 엔솔로지: 서라벌 레코드 시대 1977-1980>에 대한 김창완의 판매 금지 가처분 신청이 기각되었다는 것이다. 음반제작자 손 모 씨가 동의 없이 이 고가의 500매 한정반을 제작했고, “산울림의 창작자이자 실연자이며 음반제작자”인 김창완은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봤다. 김창완은 서라벌레코드사에서 발행한 양도승인서(“제작사항 변경으로 인해 모든 사항을 한국음반㈜(대표:김창완)에게 양도함을 승인한다.”)를 근거로 산울림 음반의 저작권과 저작인접권을 모두 갖고 있다고 여겼지만 재판부는 “곡명과 작사가ㆍ작곡가만 나열돼 있을 뿐 서라벌레코드사 음반 자체에 대한 아무 언급이 없어 이것만으로 서라벌레코드가 김창완 씨에게 저작권을 양도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90년대 후반 산울림 전집이 동의 없이 발매됐을 때, 똑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김창완이 직접 구입한 양도승인서였다. 간단히 말해 이제 산울림 1~6집의 저작인접권은 김창완의 것이 아니다.
약 40여년 전 김창훈이 결국 취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음반으로 벌어들인 소득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임금체계가 없고 계약서가 없다고 해도 그런 야만적인 일이 가능했을까 싶겠지만 군 입대 전과 후 빽빽하게, 무려 8장의 음반을 발표하고, 국민적인 히트작을 여럿 냈음에도 취직을 해야 했던 삶이 그 증거다. 안정된 길을 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매번도 아니고 가끔 공연하면 차비를 쥐어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익이 아예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산울림에게는 여전히 저작권(창작자의 권리)이라는 창작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는 있을지언정 저작인접권(실연자, 음반제작자의 권리)이라는 삼 형제의 음악 바깥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는 없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들어 산울림 노래가 드라마에 삽입되거나 젊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면서 김창완이 “(스스로는 멀리하려고 했는데) 산울림의 서정적인 노래가 아주 쬐금 좋아졌다”고 밝힌 이후였다.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음악 산업에 대한 회의감, 산울림에 대한 책임감을 짐작할 수 있을까.
그런 그에게, 김창익이 없는 이곳에서, 산울림의 1집의 그 순수하고 찬란했던 시절을 이야기하자고 억지를 써야 하는 일이었다. 떼를 쓴다고 설득이 되지도 않았겠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에 대한 어쩌면 산울림에 대한 결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울림의 음악과 역사를 통해 사람들이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한계를 만나고 전례가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우리’에 충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산울림 1집은 ‘우리’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프런트맨의 가장 앞에 서려는 노력 뿐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송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