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복사하는 게 대수냐...'고 하겠지만...
호텔이 발칵 뒤집혔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호텔 키친의 실세인 셰프 한 명이 화가 단단히 났다.
우리 호텔의 직원복지 중에 하나는 직원들이 쉬는 시간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해서 먹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50% 직원 할인까지 받을 수 있지만 고객과 셰프들의 편의를 위해 바쁜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 애플리케이션으로 제한된 음식만 주문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직원들 몇 명이 시간도 지키지 않고 손님들 사이에 줄을 서서 주문을 하고 심지어 (직원들 메뉴로는 오픈이 되지 않은)단가가 높은 스테이크를 자기 입맛에 맞게 커스터마이징까지 해가며 주문을 하고 있었던 것. 그렇게 주문한 것도 모자라서 바쁜 시간에 와서 자기 음식 왜 안 나오냐고 보채기까지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셰프가 열받아서 그 직원을 내쫓고 다음날 미팅에서 이런 상황이 나오는 것에 대해 분기탱천 하자 믿지 못한 헤드 오피서들이 CCTV까지 돌려 보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
근데 그 문제의 한가운데 있었던 직원, 나의 입사 동기였다. 나랑은 시간대가 달라서 일을 같이 한적은 많지 않고 겹쳐봐야 내가 퇴근하기 전 한 시간 정도인데 일 시작한 지 6개월 남짓에 그 친구 지각한다는 전화만 내가 받은 것만 이미 네다섯 통은 된 것 같다. 그 친구가 출근해야 하는 시간 대략 10분 전에 외부 전화를 받고 내가 매니저들이 있는 사무실로 가면 “혹시 G 늦는데?”라고 말할 정도로 이미 다른 직원들 사이에서도 알려진 모양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유독 여러 방면으로 잦은 실수를 하고 가버리는 통에 뒷수습을 해야 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호텔 이미지 때문에 그 친구가 벌인 다른 실수들을 모두 말할 수는 없지만, 그중 하나를 말하자면)
호텔 프런트는 직접 돈을 주고받는 곳이기 때문에 각자의 퇴근시간이 되면 본인이 맡았던 데스크의 cash-up을 통해 본인이 받은 금액과 시스템 사이에 variance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마치게 되어있다. 그리고 night auditor들이 모두 취합해서 하루의 업무성과를 정리하고 시스템을 다음날로 전환시키는데 종종 이 친구는 본인의 업무 중에 금액의 차이가 나타났음에도 원인을 찾아내지 않고 그냥 가버리는 통에 night auditor들이 그것을 찾아 수정하느라 시간을 낭비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오늘 G랑 L 근무했어?"
Night auditor들끼리 일하면서 금액이 맞지가 않으면 농담반 진담반으로 제일 먼저 언급하는 이름이다. 실제로 그들이 근무했다면 그들의 summary를 가장 먼저 재검토해 볼 정도로 실수가 잦은 직원들이다.
애석하게도 L도 내 입사 동기중 하나이다. 그녀도 처음에 언급한 직원들 음식 주문 문제에서도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고, 출근 두 시간 전에 방방 거리는 음악소리를 배경으로 전화하며 아프다고 병가를 내는 신기한 직원이다.
이 직원이 다른 직원들에 비해 가장 도드라질 때는 고객들 체크인을 한 등록 종이를 정리할 때이다.
하루종일 직원들이 고객들을 체크인 한 A4 종이들은 각자의 업무시간이 끝날 때 방 번호 별로 나눠진 파일함에 차곡차곡 넣어두면 내가 보고서들과 함께 한꺼번에 취합을 하는데 이 친구의 이름은 그때 거론되는 유일한 이름이다.
아니 종이를 있는 그대로 분류 해 놓는 게 뭐 어려워?
그냥 막 쑤셔 넣은 듯한 모양.
차곡차곡 잘만 정리되어있는 종이들 사이로 정신없이 막 들쑥날쑥 하고 꼬깃꼬깃하게 종이들이 뭉쳐져 있어 알면서도 그냥 한번 “이거 누가 이렇게 했어?”라고 물으면 어김없이 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한다.
“오늘 L 일했거든.”
내가 몇 번의 승진을 통해 시간대 책임자로 일했던 적 있었던 키친에서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직책에 상관없이 시키는 일을 깔끔히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간단한 설명에도 의도를 금방 파악하기도 하고 확실하지 않은 것들은 확실해질 때까지 질문해서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는, 함께 일하면 든든한 남다른 친구들이 있었다. 부탁한 일을 다했다고 해서 가보면 그런 친구들은 대체로 벤치를 늘 말끔히 정리해 놓고 다음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소한 것에서도 깔끔하게 일 마무리를 짓는 사람들이 하는 일의 완성도는 말할것도 없었다.
이틀의 휴무를 마치고 출근해서 일을 하던 중에 나의 업무 중에 하나인 finance pack (간단히 말하면 ‘일일 호텔 영업 보고서’)를 문서화시키고 프린트해서 묶어놨더니 옆에 매니저가 챙기면서 말했다.
“그녀가 돌아왔군, 그러면 Finance pack은 다시 정리 안 해도 될 만큼 깔끔하다는 뜻이지!”
한 대기업에서 간부급으로 근무하시다가 퇴직하신 외삼촌께서 언젠가 회사 생활을 하는 우리들과 얘기하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생각났다.
“일 잘하는 애들은 복사해 오는 것도 다르더라.”
그래도 일단은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