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국말이 좋아요.

슬슬 드러나는 영어의 부작용

by 영앤지


호주 아주머니랑 저녁 후 해변을 걸으며 산책을 했다.


해변가에 누워서 노래를 들으며 놀고 있는 젊은이들을 지나가는 길이었다.

슈퍼 E 인 아주머니께서 젊은이들에게


“ 이 노래 내 스타일이다~” 라며 말을 거시니

젊은이들이 명곡이라면서 맞장구를 쳤다.


여기까지는 흔한 외국인들의 스몰톡.


아주머니께서 아직 저녁이 이른데 놀러 안 가냐고 하시자 젊은이들이 어제 너무 놀아서 오늘은 쉬어야 한다고 그랬다. 그러면서,


“ 아직 저녁이 이른데 집에 가서 남편이랑 뜨밤 보낼 거야?”

라고 아주머니 질문을 바꿔서 낯 뜨거운 슬랭을 섞어서 아주머니께 물어보는데


“ 아니 그러기에 나는 너무 늙었어. 이제 잘 시간이야 내 나이는 “


하시면서 호탕하게 웃으시는 아주머니.

너무 무례한 거 아니냐며 아주머니 편들어드리려고 했던 내가 오히려 무색해졌다.


아니 물론 우리나라도 야한 농담이나 짓궂은 농담들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사람들도 있겠고, 성향이 모처럼 잘 맞은 세대를 초월한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날씨 얘기도 아니고 강아지 얘기도 아니고 이런 농담을 한다고??

이렇게 손자 손녀뻘 되는 새파랗게 어린 친구들이랑???


아주머니께서 하신 말을 곱씹으며 깔깔거리며 웃는 젊은이들과 아주머니 사이에서 혼자 당황해서 웃어야할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고 있는 나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 슈퍼바이저가 듀티 매니저인 나에게 와서 손님 한 명을 쫓아 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 손님은 50~60대로 보이는 중년이었고 젖살도 안 빠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우리 직원에게 쪽지를 건네어주었다는데 쪽지에는 얘기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자기 방 번호를 적고 일 마치고 올라와서 얘기하자는 내용이 써져 있었다. (내가 일하는 호텔은 바로 옆에 자매 호텔이 하나 더 있어서 그 호텔과 주차장도 같이 쓰고 각 호텔 손님들의 레스토랑을 왕래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이 손님은 옆 호텔에 묵고 있는 사람이었다.)


일단 나는 슈퍼바이저에게 이 친구를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로 바꾸게 하고 홀로 내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고 났더니 이 손님은 자신의 방에서 주문을 하면 이 ‘친구’가 오냐면서 다른 스태프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고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그 ‘친구’를 보기 위해 레스토랑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이 친구는 처음에 이 사달이 날 줄 모르고 그놈의 '스몰 톡'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은 오늘 룸 서비스 담당인데 홀이 바빠서 도와주고 있다는 등의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


그렇게 서 있은 지 30여분이 지났을까 그 고객은 자신이 묵는 호텔로 아주 불쾌한 표정으로 떠났다.


다행히 이 어린 친구는 큰 충격을 받았다거나 불안해하는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불쾌하고 거절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예전에 레스토랑 팀에서 일할 때 함께 일하던 60대를 훌쩍 넘긴 쟈니스 아주머니가 호텔에 수리를 하러 외부에서 온 젊다못해 이제 갓 술 마시는 게 허락되어 보이는 어린 친구들을 보면 엄청 신나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자기 스타일이라면서 어쩔 줄을 몰라하던 기억도 난다.


또 키친에서 셰프로 일할 때, 우리 어머니 보다도 두 살이 더 많은 같이 일하던 아저씨가 나에게 와서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보길래 내가 이런저런 얘기하기 귀찮아서 “이번 생애에는 포기했다.” 고 하니까 화들짝 놀라면서 "왜 포기하냐고 나도 아직 여자친구를 구하고 있다" 면서 벌어진 이 사이로 음흉함을 내보이던 일화도 있다.




종종 이런 상황들을 겪다 보면 ‘영어’라는 것이 한국어가 더 편한 나에게는, 나이 차이, 직급등과 상관없이 친근하게 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듯하면서도 처음 본 사람들과 가까운 사람들, 나이차이가 적당이 나는 사이와 부모나 조부모 정도의 차이가 나는 사이에 쓰는 화법들이 크게 다르지 않은 언어적 특징에서 오는 부작용이 존재한다고 느껴진다.


나이 차이를 넘어선 사랑은 분명히 존재하겠고 아슬아슬한 농담들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별 일 아닌 일들 일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언어를 통해서 또래와 윗사람, 처음 보는 사람과 가까운 사이의 각기 다른 존중이 느껴지는 한국어의 정서적 기반에 익숙해져 있는 나는, 그래도 그 정도의 ‘벽’을 허물 정도의 시간은 보내야 그 ‘허걱’ 하게

되는 음흉함도, 당황스럽던 농담에도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언어가 공부가 아니라 생활이라는 것은 매번 느끼면서도 해도 해도 어려운 건 여기서 태어나지 않는 한 채워질 수가 없는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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