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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Dec 27. 2019

대한민국 최대 변사사건은 왜 미스터리가 되었나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21>>


1987년 8월 29일, 아직 무더운 날이었다.


경기도 용인의 한 공예용품 공장의 천장 위에서 상상도 못 한 ‘죽음’들이 발견된다.

겨우 앉아있을 정도 높이의 좁은 공간에 32명의 시신이 빼곡히 누워있었다.


이 회사 대표 48살 박순자와 직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었다.


남자 4명에 여자 28명,

이 가운데 절반가량은 가족 사이, 그러니까 형제나 부모 자녀 사이였고

박순자의 두 아들과 딸도 죽음의 대열에 함께 했다.


경찰과 검찰은 장의사 직원들까지 동원해 시신들을 겨우 근처 학교로 옮겼고

그곳에서 바로 부검에 돌입했다.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죽음에 대한 검찰의 발표는 이렇다.


“사망자들은 대전에 본사를 둔 ‘오대양’의 대표와 직원들이다. 대표 박순자는 사이비 교주 행세를 하며 직원들에게 돈을 빌려오게 시켰고, 그 금액이 무려 170억 원에 달했다. 이 거액의 채무를 못 갚아 문제가 되자 박순자는 열성 신도들을 이끌고 용인 공장의 천장에 숨어 4박 5일 동안 머무르다 탈진 상태에서 집단자살을 했다”


남자들이 다른 이들의 목을 졸라 살해한 다음, 최후에 남은 이 모 씨가 스스로 목을 매 목숨을 끊는 것으로 ‘32명 집단 사망’이 이뤄졌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용인 현장 근처 학교에 임시 수습한 시신들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린 대한민국 최대 변사사건, 지금까지도 의혹이 꼬리를 무는 공포의 기억, 오대양 사건은 이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이 쇼킹한 장면을 마주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당장 드는 의문은 정말 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일까, 정말? 혹시 다른 곳에서 살해돼 옮겨진 것은 아닐까라는 상식적 의심이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배후에 어떤 권력이나 부당한 힘이 작용했을지 모른다는 더욱 합리적이고 더욱 공격적인 의심도 당연히 제기됐다.


그러나,,,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수사 검사 박영수 변호사(최순실 특검의 그 박영수 변호사)는 다른 곳에서 살해 뒤 옮겨졌다는 ‘추리’를 이렇게 부정한다.


“... 우리가 천장에서 시신을 아래로 내릴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철골이 아니면 발을 디딜 수가 없잖아요. 스티로폼이니까 잘못 디디면 무너지잖습니까. 처음에는 경찰관 20명이 가까운 쪽부터 내리려고 하는데 경찰관 6명이 달라붙어도 시체 한 구를 못 내려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죽여서 그 천장 위로 올렸다? 그건 그런 현장을 본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내리기도 그렇게 힘든데 어떻게 올립니까.”


타살설이 이런 증언으로 단번에 부정될 그런 간단한 주장은 물론 아니지만, 분명한 점은 1987년 1988년 1991년 세 차례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타살설을 뒷받침할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배후에서 작용한 '검은 힘'이 있을 것이란 의혹도 마찬가지다.


당시 전두환 정권 관련설, 그리고 구원파나 유병언 관련설은 계속 제기돼왔고 지금도 의심이 이어지고 있지만 증거와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확인된 게 없이, 의혹 제기로 환기되고 있는 게 타살설과 배후설의 정확한 실상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가 보자.


31명이 목 졸려 살해되고 최후의 한 명은 스스로 목매 숨졌다. 설사 이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종교적인 현혹과 위협이 있었을 것이란 게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에 바탕한 정당한 재구성이다.


그렇다면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무엇이어야 했을까.


도대체 박순자는 어떻게 이들의 정신을 지배했는가?

도대체 어떤 세뇌가 그 많은 사람들을 기꺼이 죽음까지 따라가게 만들었을까?


추종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박순자


타살설과 배후설을 해명하기 위해서라도 의문의 출발점은 이것이어야 했다.


당시 공장에 남아있던 다른 직원들은 천장에 숨어든 이들과 쪽지로 대화를 하며 경찰의 의심을 피했다. 집단과 박순자에 대한 그들의 충성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상징적 대목이다.


박순자의 지시에 그렇게 엄청난 돈을 끌어 모으고, 함께 죽음의 길을 따라나선 미스터리를 푸는 시발점은 박순자와 추종자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모임의 성격에서 찾는 게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다.


"평범한 가정주부 출신이다", "오대양교의 교주라고 하는데 과도한 이름 붙이기다"라는 식의 관점이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박순자를 둘러싼 상당수 시선들이다.


요컨대, 박순자를 넘어선 어떤 힘에 의한 사건이지, 박순자 차원에서 설명될 사건이 결코 아니라는 전제가 그만큼 강하게 깔려 있었다는 뜻이다.


거짓과 음모가 횡행하던 전두환 정권 시대가 낳은 당연한 ‘시선의 확장’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핵심인 박순자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축소시켜 놓았다.  


도대체 박순자는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벌였단 말인가?


박순자는  ‘통용’의 원리를 내세워 무소유와 재산 헌납과 그리고 사채를 끌어오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른바 ‘통용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스스로 ‘통용’의 논리만을 더욱 강력히 세뇌시키는 모임을 만들어 독립한 것으로 보인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4장 32절,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라는 구절만을 가져와서는, 소유하지 말고 나에게 가져오라는 논리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가져온 돈은 자신의 사업체와 육아원과 기숙사 등에 쏟아부어 기업인으로서 사회사업가로서 박순자라는 이름을 높이는데 아낌없이 사용됐다.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사업가로 박순자를 소개한 자체 제작 영상 (MBC뉴스 화면) 

지금 와서 돌아보면, 박순자와 오대양 사건은 한국사회 사이비 종교의 폐해를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경종을 울린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박순자의 논리와 박순자의 수법과 박순자의 관계는 철저히 파헤쳤어야 했건만, 오대양 사건에서 박순자는 왜인가 어느샌가 종범으로 밀려나 버렸다.


물론 감춰진 실체와 배후가 있다면, 끝까지 따져볼 일이다.


그런데 그 실체와 배후를 캐내려다 정작 만천하에 확실히 드러냈어야 할 가장 명백한 박순자의 악행은 오히려 뒷전에 밀린 이 난감함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이비 종교인들은 지금도 설쳐대고 있다. 혹세무민의 세력이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를 속이며 제 뱃속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오대양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 이것 말고 어디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까.


눈앞의 명백한 악행을 분명히 해야 그 뒤에 감춰진 그 무엇도 마침내 드러날 것이다.

보이는 것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그 너머만을 서둘러 따져 묻는다면...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남은 것이란 의혹과 미스터리의 대명사로서 오대양,, 결국 그렇게 됐다.

음모와 의혹과 배후는 주장과 추리만으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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