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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May 03. 2020

도공 후예, A급 전범, 한일 공생?

<<보이는 거와 많이 다른 일본-24>>


2013년 11월의 일이다. 바로 한해 전 아베 총리의 재등장 이후 한일 관계는 갈등 일변도로 폭주하고 있었고,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꽉 막힌 상황에서, 아주 실낱같은 소통의 자리로 한일 의원연맹 총회가 도쿄에서 열렸다. 


양국 국회의원들의 교류 모임은, 이럴수록 서로 더 이해하고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한 자리에 모였다. 


여느 때와 달리 언론의 관심도 높았지만 아무래도 몹시 어색한 분위기였다. 이미 양국 관계는 내리막길이었고 의원들이라 해봐야 결국 자국의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서로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서로 존중하는 덕담의 자리만 돼도, 답답한 지금으로서는 결코 의미가 작지 않다는 정도의 감각과 기대가 모였다. 


손님을 맞는 일본 쪽의 대표, 이부키 당시 중의원 의장이 인사말을 했다.


2013년 당시 일본 중의원 의장이었던 이부키 의원 


얼음장 같은 팽팽한 긴장을 풀어보려는 그의 손님맞이 메시지는 무엇일까? 일본 국회 대표의 따뜻하고도 현명한 환영사를 기대했고 그의 말에 주목했다. 


그런데, 


이부키 의장은 다소 뜬금없이 도고 시게노리 전 일본 외무대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응? 이건 뭐지? 


도고 시게노리라는 인물은 1941년 태평양 전쟁 직전과 1945년 패전 직전 일본의 외무대신을 역임한 인물이다. 일본 현대사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파로 평가돼 개전과 패전의 시기에 일본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해결책을 모색했다고, 일본인들한테는 인정받고 있다.


일본이 그나마 국체를 유지한 건, 이런 현명하고 유능한 외교관들의 역할이 컸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건 알겠는데, 왜 이 자리에서 한국 의원들 앞에서 굳이 설명하는 것일까...


도고 시게노리 전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임진왜란 때 일본 남쪽 가고시마로 끌려온 조선 도공의 후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1886년 아버지 박수승이 무덕이 5살일 때, 도고라는 일본 성을 샀고, 무덕은 일본 발음인 시게노리로, 그러니까 완전히 일본인이 된 것이다. 도공의 후예들이 힘겨운 삶 속에서 스스로 선택한 변화는 존중받아야 하고, 이를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따져볼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이부키 의장이 한일 우호의 전기를 마련해보자는 자리에서 도고 시게노리를 거론한 것은 차원이 좀 다른 문제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도고 시게노리를 강조하는 이유와 논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2차 대전 개전과 종결 때 우리나라 운명을 쥔 외무대신으로 일하고 전후 도쿄재판에서 피고가 된 사람은 한민족을 계승한 도고 시게노리 선생이었다. 5살 때 도고를 성으로 하기 전까지 박 씨 성이었던 도고 선생은 가고시마 현 출신이었다. 이곳은 선생이 태어나기 3백 년 전에 한인 도공 수백 명이 이주해 온 마을이었다. 선생의 아버지도 유복한 도공 상인이었는데 선생은 외교관으로서 활약해 태평양전쟁 개전 직전의 1941년 10월 외무대신으로 발탁되었다. 그 후 일단 그 직에서 물러났다가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 다시 외무대신으로 기용되었다. 타민족에 대한 배척과 박해가 세계 각지에서 행해지던 당시, 한민족의 후예인 도고 선생을 외교의 책임자로서 개전과 종전이라는 중대한 국가의 의사결정을 맡긴 일본의 자세야말로 양국 공생의 상징 아니겠는가?



이 인사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리 도고 시게노리가 평화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을 추진한 인물이라 해도, 우리에겐 식민 권력의 핵심이고 A급 전범으로 감옥에서 병사한 인물일 뿐이다. 조선 도공의 후예라 해도 어디까지나 자발적 귀화인으로 제국주의 질서와 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전파한, 제국 일본의 관료일 뿐이다


그런 도고 시게노리를 한반도를 배려한 사례로, 한일 공생의 상징으로 내세우다니,,, 이부키 의장의 메시지란 요컨대 일본은 ‘착한 식민통치’(!)를 했다는, 일제는 한국에 도움을 줬다는 엄청난 속내였고 절망적 강변이었다. 


그들의 아버지 시대, 그들의 할아버지 시대, 식민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는 인식이야말로 우리와 결코 화합할 수 없는 거대한 괴리다. 


이 말을 들은 한국인들이, “맞아, 일본이 우리를 참 배려해서 식민지 시대에도 도공 후예를 외무대신으로 기용하고, 조선과 공존하기 위해 일본이 정말 애를 많이 썼지”라고 생각할 거라고 그들은 정말 기대했을까... 


‘부당한 식민지배’라는 판단에서는 완벽히 벗어나 있는 그들만의 ‘선린우호’ 구호를 보면서, 일본 권력의 상식은 우리와 참 많이 다르다는 점을 다시 한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도고 시게노리 고향에 세워진 그의 동상 


식민지배에 대해 힘에 의한, 권위에 의한, 명분에 의한 그 어떠한 추궁도 받지 않은 패전국 일본은 바로 이런 모습으로, 전혀 위축됨 없는 당당함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서고 말았다. 우리로서는 거의 황당한 수준의 이야기를 그들은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선의’로 포장해 꺼내고 있다. 이 난감한 불일치를 어찌할 것인가? 


아베 총리 등장 이후 한일관계는 서로 다른 상식의 솔직한 노출과 정면충돌 과정이었고 그 불편한 노출과 충돌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한숨보다는 현실감을 가지고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파악하고 바닥까지 다 봐야 대책이 비로소 보일 것이다. 서로의 속내는 앞으로 더 드러날 것이고 드러나야만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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