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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Dec 04. 2019

미래 소년 코난과 일본 맥주 '0'

<<보이는 거와 많이 다른 일본-22>>


몇 년 전

일본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발표를 취재하러 도쿄 지브리 미술관에 간 적이 있다.


취재도 취재지만 역시 거장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은 큰 행운이란 생각이었다.

 

그는 기자회견 휴식시간에 복도 한쪽에서 조용히 담배를 피웠다. 이미 상당한 고령인데도 여전한 애연가의 모습이었고 고독한 듯 자신의 세계에 침잠한 듯한 담담함,,,


이런 게 거장의 풍모일까,, 아무튼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NHK 프로그램 포스터)



그리고 그를 통해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미야자키 감독하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원령공주 같은 수많은 걸작이 떠오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마도 ‘미래소년 코난’이 여전히 절대적이지 않을까 싶다.


코난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지위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삶에서 적어도 나의 삶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무게는 몹시 독보적이며, 거창하게 나아가자면 미야자키 감독에게서 한일관계를 읽어내려는 나를 발견하고 만다.


미래 소년 코난은 1970년대 일본 NHK에서 방영한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으로,  

1980년대 우리 TV에서 틀어주던 만화영화였다.


당시는 일본 문화 수입 자체가 금지되던 시절이라, 이 놀라운 애니메이션이 어느 나라 것인지 어린 나로서는 공식적으로 듣지 못했다.


다만 막연하게나마 일본 작품일 거라는 생각은 그때도 있었는데, 아마도 우리나라는 그런 애니메이션을 만들 능력이 아직 없다는 것과, 일본 '것'들이 비공식적으로는 많이 들어와 있어서, 딱 보면 아는 '일본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봐도 과연 그럴까 싶지만 하여튼 그때는 참으로 신기하도록 재미있었다.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오는 느낌이었고, 뭔가에 취한 듯한 느낌이었고,,, 뭔가를 꿈꾸게 되는 느낌이었다.  


완벽히 뛰어난 건지 아니면 달리 볼만한 게 없어서 그런지 지금에 와서 보면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당시 나에겐 '원탑'이었다.

미래소년 코난 포스터 (야후 재팬)

고백하자면 '코난 = 일본', 이 사실을 굳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확인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이 감동이 ‘일제’로부터 받은 것임을 직시하면 모든 게 허망하게 날아갈 것 같은 두려움이었을까,,, 어린 마음에도 일본 '것'에서 감동을 받으면 안 될 거 같은 자기 검열이었을까...


그러나, 날 설레게 하는 코난이 ‘메이드 인 재팬’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응원받으려면 뭔가 대체품이 있어야 할 텐데,, 현실은 냉정했다.  


오히려 그 시절 TV를 통해 본 수많은 만화 영화들 대부분이 일제라는 사실을 점점 알게 됐고, 일본이란 존재를 거듭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자극하고 상상하게 만들고 그래서 나중에 회고해보면 내 정서에 큰 도움을 준 만화일수록 (미제보다는) 일제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마징가 제트, 플란다스의 개, 은하철도 999,,, 모두 일본 만화였다. 솔직히 더 충격적이고 그래서 더 침울했던 건 주제가, 노래 때문이다.


캔디, 우주소년 아톰 같은 좀 더 이른 시기 수입된 TV 만화는 아예 주제가조차 일본 원작의 주제가를 그대로 가져다 가사만 우리말로 바꿨다.


그런 만화를 TV로 보면서 자랐고 그런 만화를 보면서 정서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주제가를 흥얼거렸다. 그 애니메이션들이 일본적이고 일본의 가치를 전파하는 내용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시공간을 설정해 뭔가 초월하는 감성을 갖게 만든 건 솔직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캔디 포스터 (야후 재팬)


세월이 흘러 극도의 한일갈등이 펼쳐지고 지금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거세게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급기야 일본 맥주 수입 '0'이라는 보고도 믿기 어려운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 분노가 아무리 충만하다 해도, 어떤 제품을 아예 0으로 만드는 것은 정신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때 일본 밥솥이 좋다 했고, 한때는 일본 학용품이, 한때는 일본 장난감이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다 아니다. 그 모든 것이 대체 가능하고 아니 대체품이 더 좋은 시절이 됐다.


코난을 보며 꿈을 키우고 동시에 열등감을 느낀, 그런 시절을 살아오다 보니 마치 아직도 일본이 대체 불가능하다고 실은 걱정했다.

코난을 보고 자란 세대는 필연적으로 이런 걱정과 불안과 초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미야자키 감독에게는 여전히 감사하는 마음이며,

그 시절 그 아름다운 작품들도 이제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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