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추리 Aug 06. 2021

닷새만에 만들어진 10살 살인범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25>>

1991년 9월 30일 오후 5시 무렵, 서울 마포구 대흥동 36살 권 모 씨의 집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화염과 연기를 뚫고 집안에서 한 소년이 다급히 뛰어나왔다. 권 씨의 아들인 10살 진우(가명)군으로 얼굴에 화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 그러나, 소방관들이 불길을 잡은 다음 집안에 들어가 보니 불에 탄 시신이 발견된다. 진우군의 여동생 9살 진옥(가명)양이었다.      


아이들의 부모인 권 씨 부부는 궁핍한 살림에 하루 종일 두부 장사에 매달려야 했다. 집을 거의 매일 비웠고, 어린 남매만 있던 집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안타까운 불의의 사고로 생각했지만, 생존자인 진우군의 진술에 경찰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진우 군은 학교에서 돌아온 뒤 동생과 안방에서 비디오를 보고 있었는데, 가방을 멘 우편배달원 차림의 남자가 갑자기 집안으로 들어와서는 자신의 목을 졸라 정신을 잃었다고 말했다. 뜨거운 기운을 느껴 깨어나 보니, 방안이 불길에 휩싸여 있어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는 게, 소년이 기억하는 지옥의 전모였다. 


경찰은 권 씨 가족에게 원한을 품은 누군가의 잔인한 범행으로 추정했지만, 수사는 진척되지 못했다.      


충격을 받은 아이의 진술이 명료하지 못해 용의자의 인상착의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고, 주변에서 목격자도 나오지 않았다. 며칠 탐문을 벌이던 경찰은, 매우 ‘신속하게’ 수사 방향을 전환했다. 범인 추적의 단서를 제공할 유일한 목격자인 진우 군을 오히려 용의 선상에 올린 것이다.      


경찰의 다그침에 10살 소년은 사건 발생 닷새 만에 처음 진술과는 전혀 다른 자백을 한다.      


친구와 오락실에서 놀다 집에 돌아왔는데 동생이 왜 놀아주지 않느냐며 자신을 할퀴는데 화가 나 부엌칼로 배를 찌르고, 전기장판의 전깃줄로 동생의 목을 감고 이불로 덮어 씌운 뒤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는 뛰어나왔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10살 소년이 동생을,,, 상상조차 쉽지 않은 절망적인 범행이었다.

사건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고,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반면, 경찰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권군의 자백을 받아낸 바로 다음날 언론에 대대적인 브리핑을 했고, 모든 언론은 경찰의 발표 그대로, 아니 더욱 ‘극적’으로 전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경찰이 특별히 강조해서 언론에 흘린 뒷얘기는 일제히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다. 이를테면, ‘제가 동생을 죽였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권군이 따졌으며, 그 당돌한 태도에 너무 놀랐다는 경찰의 ‘씁쓸하고도 안타까운’ 심정은, 누구도 확인할 길 없는 조사과정의 뒷얘기였음에도 여러 언론에 기정사실인 양 실렸고, 10살 소년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악마가 됐다.      


당시 권군이 살인범이라는 경찰 발표를 전한 기사 가운데는 이런 내용도 있다.      


“.. 형사 미성년자여서 부모의 손을 잡고 경찰서를 나서는 권군의 뒷모습을 보며 한 경찰 간부는 고아 아닌 고아로 길러진 권군은 커서 무엇이 될까라는 안타까운 독백을 되뇌었다..”     


이제 자백으로 범인은 잡았는데, 14살 미만이라 형사처벌을 할 수없으니, 기소하지 않는 것으로 사건 처리를 끝내기로 한다. 검찰에 넘겨진 뒤에도 경찰의 수사 내용은 그대로 인정돼 ‘권군이 범인이지만 형사 처벌 나이가 안돼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상했다. 경찰 발표 이후로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들이 속속 제기됐다. 먼저 국과수가 권양의 사인은 ‘질식사’라고 발표한 게 시작이었다. 동생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는 경찰의 설명과는 달리 연기에 질식해 숨졌으며 흉기에 찔려 내부 장기가 손상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는, 과학적 반론이 나온 것이다. 경찰은 칼로 찔렀다는 것이지 이것이 치명상이라는 말은 아니라고 한발 뺐지만, 매우 의아했다.      


또, 불을 질렀다는 진우 군이 얼굴에 화상을 입고 연기에 질식해 산소호흡기까지 부착하는 치료를 받은 사실도 쉽게 설명되지 않았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질식할 정도로, 얼굴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자신이 불 지른 집에 일부러 머물렀다? 역시 의아했다. 

     

하지만 경찰과 검찰의 결론은 끝내 달라지지 않았다.      


딸을 잃은 것도 원통한데 아들이 살인범으로 억울한 누명까지 썼다고 생각한 부모는 도무지 바로잡을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재판이라도 받으면 시시비비를 가려볼 텐데, 형사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범인은 맞는데 기소는 안 한다고 하니, 어디 가서 어떻게 따져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방법은 한 가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아이가 범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범인으로 몰아 피의 사실을 공표해 명예훼손의 정도가 막대하니 그 손해를 배상하라는 것이다.  결국, 국가는 권군에게 8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진다. 


재판부는 이렇게 판단했다.      

“... 경찰이 공표한 피의 사실은 진실이라는 증명도 없고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도 없으므로 이런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행위는 위법하여 불법행위를 구성한다... “     


권군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그러니까 권군은 범인이 아니라고, 민사재판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누명을 벗게 된 것이다.     


당시 손해배상 판결 보도 화면 


권 씨 부모는 사건 뒤 이사를 가라는 주변의 권유에 대해, 이사를 가면 아들이 진짜 범인이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라 이사할 수 없다고 버텼다고 한다. 이들 가족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했던 폭력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을지, 진범이 있다면 그 괴물은 어떤 생각을 하며 이 잔인한 과정을 지켜봤을지, 모든 게 소름 끼칠 만큼 끔찍함으로 다가올 뿐이다.     


경찰과 검찰과 법원과 언론까지.. 이들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항상 높아왔고 특히 지금 더 높은 것 같다. 개혁을 얘기할 때마다 시국 사건이나 정치적 사건이 개혁 필요성을 입증하는 가장 적확한 사례로 지목되곤 하는데, 과연 그럴까? 힘없는 서민들이 꼼짝없이 낙인찍히고 고통받았던 기억들을 철저히 기억하고 있어야 왜 개혁을 해야 하는지 분명해지지 않을까?     


정파와 진영의 논리로 바라보는 개혁이 아니라 무력하고 의지할 곳 없는 무수한 억울함들의 시선에서 개혁의 이유를 찾다 보면, 불필요한 갈등은 수그러들고, 개혁의 절실함과 진정성이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경찰은 발생 닷새만에 자백을 근거로 10살 아이를 패륜의 살인범으로 몰아가 일방적이고 대대적으로 공표했고, 언론은 ‘더더더’ 선정적으로 받아쓰기에 골몰했다. 그리고 검찰은 온갖 의문 제기에도 오만하게 무시하고 종결 처리했다. 형사 미성년자라는 법률은 재판 자체를 봉쇄해 진실을 따질 기회조차 빼앗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어디서도 억울함을 풀 길이 없는 이런 비극이,  비단 권군한테서만 벌어졌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탈영병인가? 구타 피해자인가? 아니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