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24>>
1990년 11월 26일, 2박 3일간 휴가를 마친 전경 지00 일경은 서울 증산동 집을 나섰다. 이제 자신의 소속 부대인 전북 군산의 506 전경대로 복귀해야 할 시간. (지금은 없어진 전경은 군 입대한 훈련병 중에서 차출해 경찰로 군 복무를 시킨다)
아쉬운 마음으로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다음 휴가를 기약하는 모습은, 대한민국 여느 휴가병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군 생활 열심히 하라는 부모님의 당부를 새기며 군산으로 향한, 지00 일경은 그런데.. 그 길로 사라져 버렸다.
소속 부대에서는 지 일경이 아예 귀대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탈영했다는 얘기다. 집에서 휴가 잘 보내고 밝은 표정으로 부대로 간다고 나선 아들이 탈영이라니... 날벼락같은 통보에 부모는 정신이 아득했다.
지 일경에게 탈영의 조짐으로 연결시킬만한 특이한 점이라곤 없었다. 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다 2학년을 마치고 입대했고 전경으로 차출돼 군산에서 복무 중이며 현재 계급은 일경(군으로 따지면 일병), 평범하고 착실하다는 평가 외에 추가로 더할 설명이 별로 없는, 주위에서 흔히 보는 보통의 젊은이였다.
그러나 부대의 입장은 확고했다. 지 일경의 ‘탈영’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복귀 예정일인 11월 26일 지 일경이 부대로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이날이 대입원서 접수 마감일이라 이동이 많아 차표를 구하지 못했다면서(당시 대입 원서는 해당 대학에 직접 가서 접수해야 했다) 복귀가 늦을 거 같다는 전화였다. 그러나 지 일경은 끝내 부대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튿날 오전 6시경 부대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대야검문소에서 헌병이 지 일경을 발견해, 여비가 떨어진 휴가병으로만 판단하고는 군산에서 출발한 대전행 버스를 세운 뒤, 지 일경을 태워 보낸 게 마지막 목격이라고 설명했다.
요컨대 귀대 시간이 늦어지자 처벌이 두려워 그대로 달아난 것으로, 흔히 벌어지는 탈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즉흥적 탈영자라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너무나 완벽히 사라졌고 아무런 연락도 없고 흔적도 남기지 않은, 맥락 없는 ‘증발’이란 느낌이 강해졌다.
답답하고 속이 타들어가는 가족들이 부대의 설명을 되짚어보면서, 사건은 점차 미스터리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먼저 지 일경이 탈영 다음날 오전 6시 검문소에서 대전행 버스를 탔다는 부대 설명과 달리, 당시 군산발 대전행 시외버스는 7시 반이 첫차라는 사실이 확인됐고, 이 첫차를 몰았던 운전기사는 검문소에서 전경을 태운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다.
이상하게 바라보기 시작하니 부대의 모든 설명이 의아하고 수상했다.
아직 탈영병일 뿐인데 지 일경의 소지품을 찾아가라고 가족들에게 통보한 것도 신변 이상을 알고 있는 행동처럼 보였고, 이를 전해준 동료 전경이 지 일경이 구타를 당했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거 같다는 말을 했다고 가족들은 주장했다.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지 일경의 자취는 모든 의혹의 원점이자 증폭제로 작용하며 의혹이 꼬리를 무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상식적인 의문에 경찰 스스로 부정확하고 불충분한 설명으로 의혹을 확신의 수준으로 끌고 올라간 것이다.
지 일경이 사라진 지 1년이 지난 1991년 11월
그동안 자체 조사를 해온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불교 인권위원회가 나서 지 일경의 부모와 함께 매우 단호한 기자회견을 갖는다.
지 일경이 부대에 복귀한 뒤 구타로 인해 사망했으며 부대는 시신을 유기한 천인공노할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고 공권력을 규탄했다.
특히 시신의 처리에 관해 충격적인 추리를 제시했다.
바다에 유기한 시신이 육지로 밀려오자 35살 조00 씨라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변사 처리했다는, 사실이라면 ‘만행’이라 할 만한 사건이라고 분노했다.
파장은 일파만파로 확산됐고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진상조사단을 조직해 사건 조작 가능성에 대한 증거 확보에 나서면서 공권력의 추악한 범죄가 또 드러날 것인가, 다들 숨죽였다.
그러나 이후 진상규명은 진척되지 못했고 또 하나의 의문사건으로, 또 하나의 풀리지 않는 아픔으로 남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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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차츰 희미해져 가던 1993년 4월 12일,
서울 강남에서 신문배달을 하던 한 젊은이가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경찰에 입건되는 일이 벌어진다. 경범죄로 처리될 사안이었는데 절차상 지문 채취를 한 순간, 경찰은 눈을 의심했다.
2년 5개월 전 탈영이냐 구타치사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바로 그 지00 일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멀쩡히 살아 서울 역삼동 신문배달소에서 안철홍이라는 가명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당시 부대의 주장이 맞았던 셈이다.
지 일경은 귀대 시간을 놓쳤고, 부대까지 거의 다 왔다가 처벌이 두려워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는 가족들과도 연락을 끊고 신문배달원 생활을 해왔다.
구타와 사망과 시신 유기와 사후 조작, 이 모든 과정을 완벽히 감추며 진행한다는 것도, 관련된 모든 이들을 철저히 입막음한다는 것도 상식적인 판단이라면 불가능한 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충격적인 추정과 의혹 제기가 가능했던 단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한국사회에 공권력이 개입한 혹은 개입이 매우 의심되는 충격적인 죽음이 실제로 아주 많았다는, 그 명백한 사실 때문이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뿐 아니라, 이내창 이철규 등 실종되고 변사로 발견되는 그런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지금까지도 의혹으로 남아있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 일경 타살 의혹에 대해 당시 5차례 재수사를 벌였고 1백 명 이상의 참고인 진술을 받았지만 타살 근거는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 일경이 살아서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가 어디선가 부당하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란 믿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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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연해있는 이른바 ‘확증편향’, 내가 믿고 싶은 팩트만을 진실로 생각하는 씁쓸한 현상의 원점은, 따지고 올라가 보면 과거 우리 공권력 스스로 만들어놓았던 ‘잘못들’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장 신뢰받아야 할 공권력에 보통 시민이 위협을 느껴온 그 긴 시간 동안, "당신의 말을 믿을 수없고 내가 믿는 것만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확증편향의 자양분이 쌓여왔을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원죄'를 극복하고 근본적인 신뢰의 사회로 나아가기까지는 아마도 그 불신의 기간만큼 긴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