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딸이 나를 이끌고 떠난 첫 여행, 홍콩
— 엄마가 이끌던 여행이 끝나고, 딸이 이끄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동생이 대장암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까지 한 사이클을 마쳤다.
다행히 다음 병원 진료는 한 달 뒤로 잡혀 있다.
치료의 숨 고르기 같은 시간이다.
그 사이 동생의 컨디션도 비교적 안정된 상태다.
그 짧은 틈을 내어
딸과 둘이서 홍콩 여행을 가기로 했다.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딸이 아주 어렸을 때 홍콩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모든 것을 계획했다.
숙소도, 일정도, 이동도
엄마인 내가 앞장서서 이끌던 여행이었다.
세월이 흘러
딸은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이번 여행은 딸이 직접 계획하고 안내하는 여행이 되었다.
숙소 예약부터 이동 동선,
맛집과 관광 일정까지
딸이 하나하나 준비해 두었다.
나는 그저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는
아주 편안한 여행자가 되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행은 늘 내가 주도했다.
나는 여행사 맞춤 여행을 선호했고
딸은 자유여행을 좋아했다.
이번에는 딸의 방식대로
천천히 걷고, 마음 가는 대로 머무는
자유로운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막상 그렇게 여행을 해보니
시간에 쫓기지 않고
도시의 공기와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걷는 일이 생각보다 참 좋았다.
부산에서의 나의 할 일을 최대한 마무리했다.
엄마 간병과 동생을 부탁드리고
늦은 밤 기차를 타고 서울 집으로 올라왔다.
다음 날 새벽 세 시.
잠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딸과 함께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딸이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는 여행이다.
이동하기 편하게
가벼운 배낭 하나만 달랑 메고 다니니
마음도 몸도 한결 가벼웠다.
홍콩에 도착해
이층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천천히 거리로 나섰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골목을 걷고
거리의 맛집을 찾아다니고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잠시 쉬었다.
해가 저물 무렵
홍콩의 야경을 보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홍콩의 밤은 생각보다 더 화려했다.
높은 빌딩 사이로 반짝이는 불빛들,
거리마다 흘러나오는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 속에서 딸과 나는
그저 여행자가 되어
천천히 그 밤을 걸었다.
다음 날은 배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활기찬 시장을 구경하고
명품 매장이 늘어선 거리도 지나고
푸른 나무가 가득한 공원을 함께 걸었다.
특별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딸과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참으로 여유롭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돌아보니
몇 년 만에 이렇게 긴 시간을
딸과 함께 보낸 것 같다.
그 시간들이
내 마음속에 조용히 쌓여
하나의 소중한 추억으로 새겨졌다.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딸과 함께 걸었던 홍콩의 거리와 밤풍경.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느꼈던
편안함과 기쁨이
오랫동안 내 마음을 따뜻하게 밝혀 줄 것 같다.
잠시 허락된 여행의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깨닫는다.
바쁜 간병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은 이렇게 작은 쉼을
선물처럼 내려주신다는 것을.
딸과 함께 걸었던 홍콩의 밤이
내 마음속 작은 등불이 되어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조용히 밝혀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