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햇살통통의 일상 그리기

#16. 역사가 지우려 했던 시간,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사랑

by 햇살통통

— 비바람을 뚫고 본 영화와 줄 서서 사 온 따뜻한 피자 한 판에서, 나는 곁을 지키는 사랑의 의미를 다시 배웠다.



비 바람이 몰아치던 날, 나는 혼자 영화관으로 향했다.



동생은 다음 검사 전까지 항암과 방사선치료를 잠시 쉬는 중이다. 몸은 조금 나아졌지만 쉽게 피로해진다. 오늘은 집에서 쉬기로 했다. 현관문을 나서며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금방 다녀올게.” 그 말이 괜히 더 조심스러웠다.



새벽미사를 봉헌하고, 수영을 마친 뒤, 빗속을 뚫고 본 영화는 왕과 사는 남자였다.



“1457년 청령포, 역사가 지우려 했던 이야기.”


1457년은 어린 임금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 유배되었던 시기다. 강원도 영월 청령포. 강물에 둘러싸여 세상과 단절된 자리. 왕이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



영화는 거대한 권력 싸움보다, 그 외로운 시간을 견디는 한 인간의 얼굴에 오래 머문다. 그리고 그 곁을 지킨 한 사람의 선택을 조용히 비춘다.



왕과 사는 것은 무엇일까.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어린왕의 눈빛은 위엄보다 고독이 먼저 읽혔다. 말없이 앉아 있는 장면에서조차 복잡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그를 섬기는 인물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떠나지 않는다. 위험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의무라기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인 듯한 선택.



그 모습이 내 마음을 세게 건드렸다.

집에서 쉬고 있을 동생이 떠올랐다.

병원 복도를 오가던 날들, 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긴 시간들,



우리는 대단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 있다.



왕의 자리는 높았지만, 유배의 시간은 가장 낮은 자리였다.

아픔 앞에 선 사람도 그렇다. 병은 사람을 낮은 자리로 데려다 놓는다. 그때 누군가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영화 중반을 지나며 눈물이 흘렀다.

누가 볼까 조심스럽게 훔쳤지만, 멈추지 않았다.



청령포의 강물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 수많은 사연이 잠겨 있었다. 내 마음도 그와 비슷했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새벽미사에서 드렸던 기도가 떠올랐다.

“주님, 오늘 제 자리를 지키게 해주십시오.”


영화는 말한다. 역사가 지우려 했던 시간도, 누군가의 진심까지는 지울 수 없다고. 기록되지 않아도, 곁에 남은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영화관을 나서니 비는 여전히 거세게 몰아쳤다.

우산이 뒤집힐 듯 흔들렸지만, 그냥 집으로 곧장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영화관 근처에는 부산에서 유명한 피자집이 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줄이 길게 늘어서는 곳.

잠시 망설이다가 그 줄 끝에 나도 섰다.



빗물이 운동화 속으로 스며들고, 코끝이 시릴 만큼 바람이 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따뜻했다. 조금 전까지 스크린 속에서 보았던 청령포의 고독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까.


‘사는 것, 곁에 남는다는 것.’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를 맞으며 기다려 따뜻한 피자 한 판을 사 들고 가는 마음.



한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피자를 받아 들었다. 종이 상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손끝을 녹였다. 그 온기가 꼭 사람의 체온처럼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 동생은 조용히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비 많이 오지?”

담담하게 묻는다.

“줄 서서 사 왔어. 부산에서 제일 맛있다는 피자야”

상자를 열자 고소한 치즈 향이 퍼졌다. 동생은 한 조각을 들고 천천히 베어 물었다.

“맛있다.”

그 짧은 말이, 영화의 어떤 대사보다 깊이 마음에 남았다.



왕의 곁을 지킨 사람처럼, 나도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비를 맞고 줄을 서고, 따뜻한 음식을 건네는 일.

그러나 어쩌면 사랑은 늘 이런 모양이 아닐까.


1457년 청령포에서 외로웠던 단종의 시간도,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역사는 비극을 기록하지만,

나는 오늘 따뜻한 한 조각의 피자를 기억하고 싶다.



비바람을 헤치고 다녀온 영화관람.

혼자 본 영화였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동생의 저녁이 함께 있었다.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

사랑도 그렇게 흐른다.



눈에 띄지 않아도, 기록되지 않아도,

비를 맞으며 줄 선 시간까지도

나는 오늘의 은총으로 받아 적는다.



그리고 다시 기도한다.

“주님, 오늘도 제 자리를 지키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