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기엄마는 처음이지만 요즈음의 트렌드를 보니 이유식은 6개월부터, 대신 자기가 스스로 먹는 행위로부터 결정하고, 먹어보고, 배우는 이른바 ‘자기 주도 이유식’이 유행인 듯했다. 냉동이 가능한 실리콘 큐브에 채워 넣을 각 식재료를 삶거나 쪄서 소분을 해두는 작업만으로도 매일이 너무나 바빴지만 아기가 다양한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기쁨에 도취해 자기 주도 이유식까지도 만들어 먹인 나는 그런 엄마였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예쁜 유아 식기에 식사량과 레시피를 기록하는 더 대단한 엄마들이 참 많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은 그 정도인 듯했다. 나의 남편이 그나마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최신의‘ 여러 세상을 알게 하는 창구였던 시기였기에 그럴 때마다 나의 능력의 가용 범위를 자꾸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댔기 때문이다.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니긴 하지만 어릴 적부터 나는 ‘명성’에 비해 끝까지 그 명성이 유지되는 편은 아니었다. 쉽게 말하면 도전 의식이 무언가를 참고 버티는 역량보다 더 뛰어난 쪽이었다. 그랬다 보니 인생에 슬슬 굴러오는 여러 가지 기회들이 창대한 결말로 이어진 경험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다들 놀랄 정도로 참 바쁘게 살아낸 삶이었지만 남들이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 곡절의 경험이 많다고 말하긴 조심스러운 인생이었다. 배경, 재력, 직업 또는 회사 등 남들은 자랑할 것도 참 많던데 나는 그냥 무난했다. 그런 생각이 늘 마음속에 있었고, 이유식이 어느 정도 단계에 달하니 나도 자랑스럽고 싶다는 마음이 증폭되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직무 자격증을 취득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결혼 준비로 인해 회사에서 지원해 줄 때 기회를 얻지 못한, 시험비만 50만 원이 넘는 자격증이었다. 현업에 종사하는 지인들에게 물어보면 사실 있으나 마나 한 자격증이라는 인식도 강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문 자격증도 아닌 시험이기도 하고, 실무 경험이 우선일 수밖에 없는 직무이긴 하다. 그럼에도 영어로 시험을 응시해야 하고, 나의 5년의 직무에 대한 아쉬움을 직무 확장을 통해 그나마 달랠 수 있는 기회였다. 무슨 시험 결제부터 이렇게 복잡할 일이람 하면서 남편도 아기도 자던 어느 조용한 밤에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미루고 미루던 시험 응시를 결제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자, 그럼 그다음 해야 할 것은 공부였다.
흔히 말하는 순공부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다. 언급했다시피 나의 직무에 대한 배경 지식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분량을 보니 한 200분의 1 분량에 불과한 듯했다. 일단 읽고 또 읽는 것이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비법이라고 해서 읽어보려고 했지만 모르는 영어는 왜 이리 많고, 시간을 들여 읽어도 중요도를 모르니 고작 10페이지 정도 읽으면 2-3시간이 지나갔다. 이대로는 시험을 절대 응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환불을 하고 다음에 응시할까 하니 뭔 놈의 미국 시험은 환불 수수료도 이렇게 비싼 것인가. 울며 겨자를 먹었다. 그냥 보자 마음을 먹고 남들은 몇 달을 한다는 공부를 겨우겨우 한 달 남짓 문제 풀이 위주로 돌리게 되었다. 아기를 재우고 남편과 보낼 수 있는 소소하고 소중한 시간을 보류해야 했다. 간절함이 있으면 뭐든 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간절함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렇게 하루면 4-6시간은 공부를 한 것 같다. 나름대로 문제 풀이를 효율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시트를 만들고 반복적으로 나오는 내용들 위주로 훑었다. 뭐 물론 훑는 것 만으로 간절함을 증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지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라도 하는 게 예의였다. 나 자신과, 남편과, 이 시험에 대한.
그렇게 시험을 보러 서울까지 가게 되었고 하루를 온전히 들여 이동과 4시간의 시험을 마쳤다. 4시간 동안 보는 시험 치고 결과는 어째 이리 바로 나오는지. 속상했지만 ‘Fail’이었다. 이게 맞나!
억울하고 속상하고 한 달 동안 들인 내 노력이 보상받지 못함에 툴툴 대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자정이 될 때쯤 도착해서는 남편과 미국에서 먹었던, 지금은 서울에만 있는 파이브가이즈를 먹으며 주절주절 쏟아냈지만 너무 부끄러웠다. 한 번 했으면 그래도 끝장을 봐야 하는 남편임을 알기에 나는 매번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마무리해 버리는 내 모습이 크게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어쩌겠나. 이것은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내가 품을 수 있었던 최대한의 간절함이었다.
그렇게 또 복직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이직도, 자격증도 결국은 그냥 도전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내가 배운 것은 있겠지,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경험이겠지 하며 자기 합리화를 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내가 최종적으로 가고자 하는 방향은 뭘까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