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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Nov 28. 2016

시간과 방향이 필요한 일

급하면 될 일도 안 된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왜 러시아를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


그건 아마 나와 닮은 모습 때문이었을거다.

급할 것 없고 서두르지 않는 러시아 사람들의 모습, 느리다고 해서 대충대충은 하지 않는 그 모습이 나랑 너무 닮아서 그랬을거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인이 살기엔 불편한 것들 투성이었지만,

그 속에서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늘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이 경쟁적인 세상에서 뒤처지게 되니 정말 열심히 달렸다. 달리는 순간에도 마음은 너무도 급했다.


어렸을 때의 나는 달랐다. 느림보에 잠보, 세상 천하 편했다.

그리고 느림의 미학에 맞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과목 중에서 미술 시간을 제일 기다렸고, 만화책도 많이 보면서 그림을 반복해서 따라그리며 지냈다. 집에서 만화 스케치에 쓴 종이가 너무 많아 몰래 숨겨놓을 정도였다. 물론 정식으로 배운건 아니고 내가 좋아서 했다. 그냥 끄적임 수준이었지만 내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그렇게 꾸준히 해본 건 그 때 뿐이었던 거 같다.

 

사실 그림 하나를 제대로 그린다는 건 참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때만큼은 스케치북에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분명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느림보 시계에 맞춰 사는 것에 대하여 누가 무어라 하지도 않았고 스스로도 편했다.


느림보의 끄적거림


미술을 계속 하고 싶었지만 꿈을 접고 공부를 시작하게 된 후 러시아를 만나 급물살을 탄 나의 인생은

이상하게도 혼란과 경쟁의 세상 속에 빠져들었다. 그 때부터 나는 세상의 조건을 충족해 가면서 바쁘게 지내게 되었다. 점점 느림보 습성은 사라져갔고, 잠도 줄었으며, 시간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 그림도 더 이상 그리지 않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러시아에 갔을 때는 잠시나마 나의 정체성을 찾는 것 같았다. 급하지 않아도 되니까!

산책을 즐기는 습관이 생겨났고 일기를 쓰거나 그림도 조금이라도 끄적이게 되었다. 그들의 생리에 맞추어 살면 내 마음도 편안했다. 그러나 한국 스타일을 강요당할 때마다 늘 불편함과 불평, 불만이 생겨났다.


"왜 러시아에서 불가능한 일을 한국에서는 단시간에 해내라고만 강요하는가?

왜 이런 한국 스타일을 한국인도 아닌 러시아 사람들에게까지 하도록 설득하고 권유해야 하는걸까?"


꿈나라에 다녀온듯 러시아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 때부터 나의 시간표는 다시금 고속으로 맞추어져 있었다. 가끔 향수가 느껴져 그림 하나라도 그려보려 해도 '이럴 시간이 어딨어'하며 펜을 놓아버린다. 소형 스케치북을 샀지만 몇 년 째 단 한 장 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내가 다시금 러시아가 그리워지고 돌아가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그 반대 작용으로 분출하게 된 것이 '글'이었다.

내가 책을 많이 읽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느꼈던 나의 기분을 한 글자 두 글자 적은 것이 나름대로 훈련이 되었는가 보다. 글쓰는 것도 조급함을 가지고는 도저히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그림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되니 쪽글을 쓰듯 짬짬이 할 수 있는 일이라 나에겐 알게 모르게 힘이 되었던 것 같다.


그동안 조급하게 쉬지도 않고 달려온 부작용으로 방향 점검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지금은 잠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의 '토끼'가 된 상태이지만, 달려오면서 깨닫게 된 사실 하나가 있다.

급하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것.


지금 나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한 채 섣불리 달리려고만 한다면 다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방향을 맞게 잡았는지, 그리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힘들고 어렵다고 조급하게 결정을 번복하거나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래야 오래 갈 수 있다. 제발 그렇게 되기를.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말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해야 한다는 것.

업으로 삼게 되는 순간, 부담이 찾아오고 그 애정은 반으로 줄어든다.


스스로 참 많은 것들을 배우는 광야의 시간들이다. 급한 마음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러시아로 가야 하건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다음 러시아 도시가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나는 느림보 습성을 되살리고 있구나:)


★ 게재한 모든 사진들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Copyright by 모험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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