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러시아 여행작가입니다.
'러시아'를 뺀 여행작가 타이틀만으로 새로 활동할 생각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만큼 러시아는 이미 오랜 시간 나의 정체성이 된 수식어이다.
그런데 세상도 통제할 수 없는 코로나19와 전쟁으로 러시아에 갈 이유 자체가 없어진 지 5년이 넘고,
본업은 뒷전으로 미룬 채 생업에 매달리며 지낸 시간이 길어지고 말았다.
러시아를 잊고 싶지 않아 마음에만 담고 살았는데,
'전쟁 중인데 안전할까?', '한국이 러시아의 비우호국인데 갈 수나 있는 건가?'
이런 현실적인 질문과 핑계들로 갈 생각은 아예 접고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현지에 계시거나 다녀온 분들 이야기는 좀 달랐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평화롭고 살기 좋아!'...
진짜 모습은 다른가 보다!
그럼 러시아에 직접 가서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는가? 항공편을 찾아보니 모스크바를 가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가나 항공임 차이가 크지 않았다. 기왕이면 수도로 가자고 결심했다. 고민만 몇 년을 했으나 마음을 정했더니 실행은 빨랐다.
6년 만의 모스크바 방문이라 초보 여행자의 마음으로 임했다. 지금은 한국과 직항도 없어 환승을 해야 하는데, 여러 루트 중에서 중국을 거쳐 가기로 했다. 중국 경유라니... 수없이 러시아를 오갔던 나라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중국을 거쳐서 떠나는 모스크바(출처: 저자 제공)
멀고도 험한 모스크바 입성
상하이 푸동 공항을 경유하여 모스크바로 향했다. 비행 스케줄에 따르면 환승 시간은 불과 2시간도 되지 않아 혹여 연착해 비행기 놓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예정보다 일찍 상하이에 도착했고, 다른 유럽 환승객들도 많아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 분위기였다. 공항이 얼마나 큰지, 마음은 급한데 걷고 걸어도 환승 안내판이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나름 중국 본토 입성인데(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육로로 훈춘과 연길에 간 적은 있다), 공항만 찍고 가는게 아쉽긴 했으나 그런 생각할 시간도 사치였다. 한시라도 빨리 환승 게이트로 가야 한다.
시간도 촉박한데 환승 전 중국 보안 검색대를 한번 더 지나야 했다. 가벼이 지날 곳은 아니었다. 개인 짐을 검색대로 보내고 난 탐지기만 통과하면 되겠거니 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중국 여성 보안 요원이 다가와 당혹스러울 정도로 몸을 아주 구석구석 손으로 스캔하며 수색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좀 쪼그라들었다(?). 잠시 후 짐을 유심히 살핀 검색대 직원이 날 부르더니 카메라와 배터리가 있는 걸 다 꺼내란다. 아, 중국에선 리튬 배터리를 좀 엄격하게 살핀다고 어디선가 봤던 것 같다! 내 카메라와 배터리를 꺼내 보여주었는데, 이를 확인한 직원은 재차 확인하고자 짐을 그대로 들고가 검색대에 다시 올려놓는 게 아닌가? 뒤에 줄 서있는 사람도 가득인데 짐은 어느 세월에 검색대를 지나서 나오려나, 혹시 또 배터리 시비 걸면 어쩌나 걱정만 늘었다. 어느 새 시간은 탑승시각에 가까워졌고, 다행히 별 얘기가 없어서 탑승에 늦지는 않았다.
상해 푸동 공항과 만석 비행기(출처: 저자 제공)
반신반의하며 탔던 중국 항공기가 생각보다 괜찮았다. 걱정했던 것에 비해서 기내식, 서비스 모두 만족스러워서 '어, 탈 만한데?'란 생각이 들었다. 50~60만원 가격에 이 정도 수준이면 가성비도 훌륭하다. 게다가 좌석도 거의 만석이었던 걸 보면, 중국이 많이 달라졌구나 싶다.
10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모스크바 셰레메티에보 공항에 도착했다. 그나마 예전에 오갔던 공항이라 마음이 좀 놓였다. 하지만 예전과는 좀 달라져 있었다. 나중에야 알고 찾아봤더니 현재 셰레메티에보 공항은 터미널만 총 5개였는데, 그중 2개는 팬데믹과 제재 이후 가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내가 도착했던 곳은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2020년 신규 확장한 C터미널이었다. 모스크바 마지막 방문 때까지는 남부의 터미널들만 이용했던 지라, 사실상 C터미널은 첫 방문이다. 4년 전 오픈해 그런지 시설이 그냥 봐도 꽤 신식으로 때깔이 좋았다.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출처: 저자 제공)
'러시아' 하면 '줄' 아니겠는가?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사람 많은 곳에서 기다림은 필수였다. 하필이면 비슷한 시간대에 중국발 비행기 3대가 연이어 도착한 탓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입국심사 창구에 줄을 잘서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줄 한번 잘못 섰다가는 사람이 빠지지 않아 낭패를 볼 수 있다. 가만히 서있어도 여기저기서 중국어가 들려온다. 그중 한국인은 거의 없었고 딱히 식별할 길도 없었다. 모스크바를 찾은 절대다수가 중국인인 걸 보니, 중러 간 인적 교류가 이리 활발한 모습에 내심 부러웠다. 왜 러시아와 한국은 이토록 먼 사이가 되어버린 걸까? 아무튼 나는 기약없이 멍때리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념하고 기다리다 심사창구 스크린 속 낯익은 곱슬머리 형상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푸시킨이 태어난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래, 푸시킨! 순간 고향에 온 듯 편안해졌다. 그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하지 않았던가? 이미 내 마음은 미래에 살고 있다.
입국 심사 중 전광판에 보인 '푸시킨이 태어난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문구(출처: 저자 제공)
1시간 넘게 기다린 것 같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요즘 입국심사 중 이유 없이 한국인들이 몇 시간씩 붙잡히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하는데, 다행히 나는 잡히지 않았다. 우즈벡 도장이 찍혀있는 거 보고 무슨 일로 갔냐는 질문만 받았다. 단, 출입국 카드에 러시아어로 내 이름을 요상하게 표기한 게 맘에 들지 않았을 뿐! 아차, 부리나케 짐을 찾으러 갔는데, 전광판에 내가 타고 온 비행기 편명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일? 가동중인 짐 찾는 곳마다 확인해봤다. 왔다갔다 하다가 상황판을 다시 살펴 보니 내 캐리어는 다음 항공기 도착 수하물에 섞여 있었다. 이미 짐은 컨베이어 벨트를 여러 번 돌며 나보다 모스크바 구경을 먼저 하고 있었던 것!
그렇게 무사히 짐을 찾아 내 공간에 온 것처럼 누비며 공항철도역으로 잽싸게 이동했다. 와, 그런데 무슨 공항이 이렇게 좋지? 내가 알던 곳이 아니라 신기한 광경에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 공항도 큰데 가는 길에 심카드 가게 하나쯤은 있겠지 생각하고 직진했건만 바로 철도역이 나와버린다. 내가 다녔던 익숙한 공간이 아니라 살짝 당황했다. 안내원께 물어보니 심카드 가게에 가려면 왔던 길을 한참 되돌아가야 한단다. 발길을 돌렸다가 짐도 무겁고 시간이 지체돼 포기했다. 그렇게 왔다갔다만 두 번을 했다. 사서 고생을 한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에보 공항 C터미널 풍경(출처: 저자 제공)
결국 느지막이 공항철도역에 도착했다. 현찰밖에 없어 매표소로 향했다. 매표소 아주머니는 왕복표를 사면 100루블이 저렴하다며 구입을 권한다. 표는 30일 간 유효하고 QR 코드를 사진 찍어두면 올 때 쓸 수 있다고까지 친절히 설명해준다. 이런 마케팅, 서비스 마인드 뭐람? 그렇게 홀린듯(?) 왕복표를 사서 공항철도를 탔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예전에는 40분 정도면 왔는데, 거의 한 시간을 달려 벨라루스카야역에 도착했다. 열차 속도가 느려졌나 싶었는데, 아, C터미널이 북부에 있어 더 멀어진 거구나! 나중에야 알았다. 드디어 모스크바 시내 도착! 무거운 짐을 끌고 공항철도역에서 지하철역까지 좀 걸어 이동을 해야 한다. 밖으로 나가려고 보니, 거센 바람에 폭우까지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모스크바야, 나를 맞이하는 환영식이 이리도 강렬하단 말이냐? 주섬주섬 대형 캐리어에서 강풍 한방에 부러질 것 같은 양산 겸 우산 꺼내어 쓰고 몸통 절반은 비를 맞은 채 조심조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입국 신고식 한번 제대로 했다.
공항철도를 다니는 2층 열차(출처: 저자 제공)
생명력 넘치는 모스크비치들의 움직임
그렇게 힘들게 입성한 모스크바. 첫날과 둘째 날 엄청난 비와 바람으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초여름 모스크바에 이런 날씨는 다들 처음이라고 했다. 악천후 가운데도 나는 최대한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며 다녔다. 최대한 현지인처럼 지내면서 그들 속에서 분위기가 어떤지 직접 체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고 싶은 곳이 많아서 하루에 수없이 지하철과 버스를 탔다. 특히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 이용은 트로이카Тройка 카드 하나만 있으면 환승 할인도 되고, 1회 이용 금액이 제일 저렴해서 좋았다. 우리의 선불 교통카드처럼 구매 후 금액을 충전해서 사용하면 된다. 예전에는 트로이카 교통카드가 있다는 건 알았어도 따로 장만할 정도의 혜택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비교해보니 꽤 경제적이어서 유용하게 사용했다.(지하철 1회 기준: 트로이카 카드 57루블, 틴코프 카드 64루블, 1회권 70루블)
말 세 마리가 그려있는 트로이카 교통카드(출처: 저자 제공)
도시는 활력이 넘쳤다. 출근하는 사람들, 거리를 치우는 사람들, 가게를 여는 사람들... 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도시는 가는 곳마다 깨끗했고, 무엇보다 대중교통 타고 도시 이곳저곳을 다녀도 어디나 안전했다. 지난 3월 모스크바 근교 크로쿠스 공연장에서 테러가 발생한 이후, 공공장소마다 경찰이나 보안 요원이 철저하게 큰 짐을 검색하고 신원을 확인하는 등 보안이 강화된 영향이 물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방문할 때마다 늘 주위를 경계하며 다니는 것이 익숙했던 모스크바에서 ‘안전하다’고 느낀 건 꽤나 낯선 감정이었다.
모스크바 지하철역 풍경(출처: 저자 제공)
모스크바는 인구 1천 3백만 명의 도시다. 모스크비치(모스크바 사는 사람)들의 주요 교통수단인 지하철에도 불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생동감이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교통 수단인 만큼 서로 부대끼다 보면 안전에 취약할 수도 있는데, 그런 느낌이 없었다. 역에는 경찰이나 안전 요원들이 지키고 있고 이용객들도 서로를 배려하기 때문이겠지만, 배차간격이 짧은 것도 한몫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출퇴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이 일상인데, 모스크바 지하철은 배차간격이 1~2분으로 짧아서 금방금방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출퇴근 시간에도 열차가 적당히 붐빌 정도이다. 얼마나 열차가 많으면 그렇게 빨리빨리 돌리는 걸까? 물론 열차는 서울 지하철보다 폭도 좁고 짧기는 하지만, 열차 수량이나 속도 측면에서는 모스크바가 우월하다.
또 날이 갈수록 모스크바 지하철은 더욱 진화하여 지상철은 물론, 우리의 GTX처럼 수도권까지 이어지는 D라인(모스크바 도심 직경)도 4개나 생겨 이제 지하철은 모스크바의 모세혈관이자 거대 그물망이 되었다. 속도도 빠르고 접근성이 높으니 마음만 먹으면 멀리 가는 건 일도 아니다. 대신 여러 노선이 겹쳐 지하철역이 한층 더 복잡해진 곳들도 좀 있다. 두눈 똑바로 뜨고 다녀야 한다.(다행히 역 영문명 표기가 다 되어있다.)
복잡한 모스크바 지하철 노선도 2024년 기준(출처: mskof.ru)
스마트폰 삼매경인 지하철 승객들(출처: 저자 제공)
지하철을 탄 승객들의 모습도 예전과는 너무 다르다. 어두컴컴하거나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은 거의 안 보이고, 이제는 대부분 잘 차려입었다. 여름 무렵이라 옷 색상은 알록달록 개성있는 것들이 많았고, 젊은 사람들일수록 더 눈길이 가는 차림새였다. 열차 폭이 좁아 좌석에 앉으면 맞은편 승객들이 유난히 가깝게 보인다.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를 정도. 그래도 유심히 살펴 보니 다들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양쪽 귀에는 소위 '콩나물'(아이폰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남의 시선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한두명 정도는 옛날처럼 종이책을 든 사람이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의 전멸이다. 대부분이 우리나라처럼 스마트폰 삼매경이었다. 아날로그의 나라 러시아에서도 이런 세계적인 트렌드를 벗어날 순 없었구나!
도시에는 지하철 외에 이동수단도 다양해졌다. 비교적 최근에는 새로운 대중교통이 등장했다. 작년 6월부터 모스크바강 서북·동남쪽 2개 구간에서 수상트램이 운행되고 있다. 한번은 강변을 거닐다 선착장에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길래 유람선 탑승객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수상트램을 타려고 대기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용객 수에 비해 수용 가능한 시설 규모가 크지 않아 대기자들이 항상 많은 것이다. 수상트램으로 이용되는 선박은 최신 시설에 약 50석 규모로, 놀랍게도 사계절 내내 운행한다. 겨울에도 언 강을 깨면서 다닐 수 있다고 한다. 수상트램은 전기를 사용해서 친환경적일 뿐만 아니라, 순수 러시아산으로 제조되었다. 그래서 더욱 도시의 자랑거리가 된 것 같다. 수상트램은 트로이카 교통카드로도 이용 가능하다.
모스크바 수상트램(출처: smartik.ru) 모스크바 수상트램 운행 노선(출처: 저자 제공)
지하와 수상 교통수단이 이렇다면, 지상에서는 거리에 전동킥보드가 많다. 나도 길을 가다가 휙 지나가는 전동킥보드에 여러 번 놀랐다. 지하철역 부근이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주욱 주차되어 있는 킥보드는 주로 젊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원칙적으로는 헬멧을 쓰고 타야 하는데 생각보다 안전 장치 없이 타는 사람이 많다. 거리에 비치된 공유자전거도 종종 눈에 띄었으나, 자전거 타는 사람들보다 킥보드 타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보행자나 차량과 충돌이 있을까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처럼 도처에 이런 접근성 높은 공유 이동 수단이 시민들의 두 발을 대신하는 덕분에 도시가 더 활기차 보이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곧 기나긴 겨울이 닥치면 그마저도 오랜 시간 사용할 수 없을 테니, 탈 수 있을 때 실컷 즐기는 편이 이들에겐 더 낫겠다 싶다.
도심 속 전동킥보드 이용자들(출처: 저자 제공)
제재 이후 모스크바의 모습? 아직 입문에 불과하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계속!
[모스크바 산책 영상1]
[러시아연구소 러시아·유라시아 포커스 제798호 변함없는 모스크바의 이유 있는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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