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환영 받지 못하는, 한국에서 온 손님
나에게 고향 같은 도시 블라디보스토크.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라 코로나와 전쟁 이후 방문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지금껏 소홀했던 러시아 여행작가로서의 사명감에 사로잡혀 급작스레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게 되었다. 내 전문 지역에 2019년 갔다온 후 지금껏 가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 돼?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당장 여행은 어렵더라도 대중에게 지금의 러시아,
특별히 우리가 애정했던 여행지 블라디보스토크의 현재를 직접 보고 와서 전하자!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짧은 블라디보스토크행.
2025년 8월, 무려 6년 만의 방문이다.
설렘을 안고 어렵게 중국을 거쳐 그곳에 도착했다. 예상은 했지만 옛날의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니었다.
이미 공항에서부터 나를 반기지 않았다. 오래 대기 끝에 겨우 나의 입국심사 차례가 되어 여권을 주고 기다렸는데, 상자(입국 스탬프 찍어주는 장소) 속 여인이 어디로 전화를 걸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곧 사람이 올 거니까 이 옆에서 좀 기다리셔."
"계속 기다려요?"
"응. 기다려, 기다려."
그렇게 나는 제외되었다. 존칭이라고는 없었다.
나를 세워둔 채 그 여인은 다음 사람 입국심사를 진행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의 입국심사 분위기는 예전과 확연히 달랐다.
나랑 비슷한 외모를 가진 수많은 중국인은 하나둘씩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갔지만,
나는 구석에 있는 방문 앞으로 안내되었다. 러시아가 비우호국으로 지정한 다른 국가의 입국자들과 함께 인터뷰 순서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러 극동지역 방문시 유의 안내문 상세보기|영사민원 및 각종 공지 | 주블라디보스톡 대한민국 총영사관
2025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홈페이지에는 '러 극동지역 방문시 유의 안내문'이 공지됐다.
극동 주요 지역 공항에서 한국인을 포함한 비우호국가 외국인 대상으로 입국심사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입국자들 중 무작위로 별도 사무실에서 고강도 인터뷰가 진행될 수 있다고. 해당 공지를 이미 접하고 간 터라 잡힐(?) 각오는 했지만, 내가 타고 온 비행기가 거의 마지막이라서 퇴근해도 될 것 같은 상황에서조차 이렇게 걸릴 줄은 몰랐다.
5~6명 대기자 중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내 뒤로 일본인도 안내되어 왔다. 혼자 온 친구였는데 어디서 왔냐 서로 묻다가 대화를 나누며 대기 시간을 보냈다. 오자마자 쓴 언어가 일본인과의 영어라니!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지만 그 또한 나와 같은 숙소를 예약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행선지가 같으니 시내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입국심사 독방 인터뷰, 두둥.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어떤 이는 휴대폰이 털리고 또 어떤 이는 사진 찍혔다는 등 경험담을 본 기억이 있어 휴대폰은 일찌감치 가방에 고이 넣어뒀다. 방 안에 들어가니 방문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한곳으로 안내되었다. 살짝 긴장된 분위기.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풀려날(?) 것임을. 독방에는 유니폼 입은 출입국관리국(추정) 직원 셋이 앉아 있었고 나를 안내한 직원도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내가 러시아어를 '조금' 한다고 하니 반기는 눈치였다. 아마 내 직전의 미국인, 유럽인 인터뷰이들에겐 영어를 써서 피곤했을 터. 나에게 제일 먼저 블라디보스토크에 처음 왔냐고 묻는다. 그럴리가요? 직원이 컴퓨터를 두드리며 코로나 이전 방문 이력도 다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여권을 바꿨는데도 찾아내다니, 음.
그리고는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본다.
혼자 왔냐, 언제 돌아가냐, 숙소는 어디냐, 한국에서 어디 사냐,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냐, 돈은 얼마나 가져 왔냐. 그리고 여권에 우즈벡, 카작, 타직, 아제르바이잔 입국 도장을 보며 거긴 왜 갔냐, 그룹으로 갔냐 등등.
질문에 답을 이어가다가, 나는 당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 정체를 밝혔다.
"사실 저는 한국어로 블라디보스토크 가이드북을 쓴 사람이에요. 책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국인들 엄청 많이 왔었잖아요. 기억하시죠?"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평소 내 존재를 드러내는 일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사람인데.
내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흥미로워했다. 한때 블라디보스토크에 한국 관광객이 많았다는 걸 기억하고 있어, 지금은 직항이 없어 불편하겠다고도 공감해 줬다. 그리고 현재 한국 대통령이 여성 아니냐고도 물어봤다. 아니, 10년 전 얘기를 하다니 그들의 한국은 그때 멈춰 있구나 싶었다. 교류가 너무 오래 끊긴 게 분명해.
분위기가 서로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까지 된 듯하자 그들에게 솔직하게 물어봤다.
"모든 한국인에게 이런 인터뷰를 다 하나요?"
"방침이 그래요. 그래야 하는 상황이에요."
본인들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답변을 했다. 그래, 그 입장도 이해는 된다. 현 정세에 따라 이제는 중국, 북한 사람들 입국은 환영하겠지. 요즘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와 콘텐츠에 얼마나 열광하는데, 너희도 좋아하면서 왜 우리한테 이렇게 박한 거니?
인터뷰 말미에 당연히 그들이 해줄 수 없다는 걸 잘 알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제발 직항 좀 만들어 주세요!"
"그건 우리 일이 아니에요."
나는 책임지지 않는다, 러시아 사람다운 대답이었다.
인터뷰는 그렇게 유쾌한 분위기 속에 마무리 되었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왜 나의 정보를 그들에게 공개해야 하는가? 물론 이런 심층 인터뷰도 복불복이라고 한다. 모스크바나 노보시비르스크에 갔을 때도 걸린 적은 없었으니.
입국을 마치고 나오니 수하물 찾는 곳에 내 캐리어만 달랑 남아 있었다.
이미 어둑해지기 시작해 적막함만 감도는 공항.
6년 만에 방문한 블라디보스토크 입국 진풍경. 이렇게 불청객 취급을 당해서야 원.
2026년 7월부터는 ruID 어플을 다운 받아 사전에 온라인 입국신고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데,
갈수록 러시아에 들어오는 장벽이 높아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러시아야, 왜 점점 중국을 닮아가니?
다음에 들어올 때는 다른 멘트를 좀 준비해서 와야겠다.
아니, 그보다 그때 즈음이면 이런 방침은 싹 사라졌으면.
되던 일도 안 되고, 안 되던 일도 되는 곳이 바로 러시아니까.
[여행기 영상 1편]
[다음 이야기↓↓]
★ 게재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Copyright by 모험소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