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아닌 다른 곳을 여행한다는 건
러시아만 열심히 여행하던 나의 모험심을 살짝 자극한 포르투갈.
인터넷으로 찾아본 몇 컷의 사진만으로도 그곳에 갈 이유가 충분했다. 아름다움, 옛스러움, 그리고 따스함!
추위로 얼어붙었던 극동 블라디보스톡을 탐험했으니, 그 반대편 대륙 서쪽 땅 끝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무작정 떠난 여행 길. 사전에 지도나 관광지를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이런 여행도 처음이다.
포르투갈 여행을 다짐하게 만들었던 곳은 바로 포르투(Porto)... 투박하기 이를데 없는 커다란 동 루이스 1세 다리만 보고 여긴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거기에 리스본은 덤..!
발길 닿는대로
참 매력적이다. 특히 포르투갈의 작고 오래된 도시를 걷는 여행은 더욱!
작은 골목 구석구석 가는 곳마다 만나는 오랜 건물은 이곳이 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해도 그저 기분 좋게 만든다. 시간 제약도 없다. 나와는 다른 여행자들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다. 하지만 워낙 관광객들이 많은 도시라 행여나 소매치기를 만날까 러시아 여행때와는 달리 긴장도 꽤 많이 했던 것 같다.
<골목마다 예쁘고도 옛날의 멋이 깃든포르투갈 도시의 모습>
그리고 내게 닥친 사건사고(?)는 그곳에 대한 인상을 바꿔놓았다.
홀로 리스본에서 나름대로 좋은 시간을 보내고 포르투로 이동할 때의 일이다.
용감하게 캐리어를 끌고와 버스 타고 이동하겠다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버스 터미널 위치와 시간표 확인 후, 서너시간 여행길 주린 배를 채워줄 에그타르트와 포르투갈 길거리 군밤을 준비해 버스에 올랐다. 두 좌석에 하나만 있는 전원 코드를 옆사람과 나란히 양보해 쓰면서 핸드폰도 충전시키니 마음까지 넉넉해졌다.
파티마에 버려지다
사람들로 가득찬 버스는 몇 시간 신나게 달리더니 파티마에 정차했다. 성자들 순례지인 이곳엔 꽤 많은 사람들이 하차했다. 다들 내리는 분위기라 여기서 조금 쉬었다 포르투로 출발하나보다 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여자 화장실은 늘 그렇듯 줄이 너무도 길다. 포기하고 돌아갈까 했지만, 그럭저럭 줄이 잘 줄어들고 있었다. 내 차례가 가까워질 무렵 포르투갈어로 무슨 안내방송이 나왔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2 분 후 나와 보니 내가 탔던 버스가 눈앞에서 코너를 돌아 가버리는게 아닌가!
아까 포르투갈어로 지껄이던게 내 버스가 출발한다는 방송이었던 것. 영어가 아니니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혼비백산 순간 버스에 남기고 온 내 물건들이 뭔지 떠올리며 내 몸은 자동으로 매표소를 향해 있었다.
"그 짐들 잃어버린 셈 쳐야하나.."
러시아에서 안좋은 일만 몽땅 당해왔던지라 최악의 순간까지 생각하는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주변에 직원이 없어 황급히 매표소 언니에게 어줍잖은 영어와 당황이 역력한 표정으로 내 버스가 떠나버렸다고 하소연했다. 의외로 그 언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방금 떠난거 맞다'며 어딘가 전화를 하는게 아닌가. 출발한지 얼마 안됐으니 혹시 버스 기사에게 돌아오라 하는건가 잠시 희망을 품었으나 그건 아니었다.
"짐이 있나요? 무슨 색? 좌석엔 뭘 두고 왔나요?"
짐칸 캐리어와 내 자리의 간식들. 솔직히 간식은 누가 먹어도 좋지만 캐리어가 없어지면 뭐부터 해야 하나 막막했다. 다행히 그쪽 직원과 통화하고는 포르투 터미널에 내 짐을 보관하도록 얘기해 놓았다며 날 안심시킨다. 그리곤 20분 후 포르투행 버스를 타고 가라며 내 티켓에 버스 번호와 좌석 번호를 적어주었다. 사실 다음 버스를 타게 해준 건 좀 감동하면서도 내심 의심했다. 내 짐이 정말 무사할까.
러시아가 준 이놈의 의심병...... 이 사건 이후론 버스는 탈 때마다 기사에게 언제 출발하냐고 물어보게 되었다.
재회, 그리고 고마운 아저씨
포르투까지 달리는 두 시간은 가시방석 같았다. 별별 시나리오를 다 써가면서. 다행히 돈과 서류는 핸드백에 있지만 짐 못찾으면 어디서 뭘 사야할지, 아직 여행이 일주일 남았는데 어떻게 버틸지 등등. 그리고 포르투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터미널을 휘젓고 다녔다. 짐이라곤 보이지 않아 수하물 보관소, 매표소 아저씨, 아줌마 붙잡고 물어봤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매표소 옆 사무실에 캐리어와 간식까지 고스란히 있지 않은가! 연신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배가 허기가 져서 그 자리에서 에그타르트 두 개를 먹어치웠다. 사실 간식도 하나도 손을 못댔던지라 아깝겠다 싶긴 했다. 터미널 구석에서 먹은 에그타르트의 맛은 잊을 수 없을거다.
그리고 가까운 지하철로 향했는데, 리스본과 달리 개찰구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바로 플랫폼이 나왔다. 이상하다 생각하던 찰나,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내려온 아저씨가 어려운 영어로 나에게 공항으로 가냐고 물어본다. 나는 아니라고 시내로 간다고 했다. 얘기한 김에 표는 어디서 사는건지 물어봤다.
그때부터 아저씨는 영어도 잘 못하시지만 신나라 하며 나에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표는 위에서 사면 되는데요. 아, 저는 시간이 많으니 도와주겠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엥, 시간이 많다고? 사기꾼인가? 역시 이놈의 의심병....
그분이 내게 보여준 건 신분증 같은 거였는데, 자세히 보니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다. 이렇게 거리낌없이 외국인인 내게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친절함을 베푸시다니! 적잖이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저는 당신을 도와줄 의무가 있습니다. 도와드릴 시간 많습니다. 표 사는 것 도와줄테니 올라가요."
올라가는 길에 다시 한 번 자기 신분증을 보여주신다. 아, 네 공무원님... 그리고 기계에서 안단테(포르투 지하철표)를 사는 걸 도와주셨다. 역시 사전 조사하지 않고 여행 오니 이런걸 모르는구나. 포르투는 별도 개찰구 없이 멀뚱히 세워진 태그판에 지하철표 태그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가는 역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환승을 해야 했는데, 환승할 때 어디 방향 지하철을 타야 하는지를 신신당부하고 여러번 반복해서 얘기를 해주신다. 내가 혹시 잘못 알까 영수증 뒤에 글자로 적어주셨다. 확실히 토종 포르투갈인 영어 알아듣긴 쉽지 않았지만, 글씨까지 써주시니 완벽! 하지만 아저씨는 악필이었다는...
그 나름의 험난한 여행길이 너무 감사했다. 덕분에 나는 아름다운 포르투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친절한 사람들과 좋은 인상 덕분에 더욱 감동했던 여행. 그동안 나의 마음이 얼마나 세상에 물들어(?)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해준 기분 좋은 일탈이었다.
분명한 건, 내가 의심의 눈초리로 끊임 없이 누군가를 비뚤게 보면 세상까지 삐딱하게 보이고,
내가 먼저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가면 사람들도 좋은 사람들만 만나게 되고 세상도 한결 밝게 보인다는 점!
러시아만 다니며 나도 모르게 쌓아온 의심병은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통해 조금씩 사라질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여러 세상을 경험해야 하는가보다.
내년 한 해는 나에게 또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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