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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lySummer Jan 27. 2024

비빔밥 헤이터

    내게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한결같이 말하는 음식이 몇 가지 있다. 콩국수, 팥칼국수, 들깨수제비(칼국수) 그리고 비빔밥. 비빔밥을 제외하고 앞에 언급한 것들은 콩류와 깨의 진한 국물에 밀가루 반죽이 투하된 요리들이다. 즉, 내가 싫어하는 데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 콩과 팥, 들깨의 육수는 내게 너무 버겁도록 담백하고 숨이 막히는 맛없음을 선사한다. 시도는 맹렬히 해 보았었다. 사실 소싯적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사람이 소망인-이런 게 무슨 소망이야...- 내가 입맛에 맞지 않는 특정 음식들이 있어 거부한다는 것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이기도 했었다. 제일 맛있다는 콩국수집들도 가보았고 100프로 국내콩으로 갈아준 엄마표 콩국수도 먹어보았고 별별 맑은 들깻국들도 섭렵해 보았다. 모두 실패. 그 특유의 맛에 내 혀가 기겁을 하고 목구멍이 빗장을 잠가버리더라. 참고로 비비빅 좋아하고 두유 러버이고 콩자반 노 프라블럼. 들깨도 순댓국이나 추어탕에 아빠 숟가락으로 두 숟갈은 넣어야 행복한 나. 그런데 위의 음식들은 입과 머리에서 "아아악!!! 못 먹겠어. 미안해." 이러면서 빠른 패배를 인정하는 느낌이다. 엄밀히 말하면 싫어하기보다는 못.먹.는 음식에 가깝다. 입(mouth)장불가. 그것밖에 먹을 것이 없다면 살기 위해 먹지만 다른 선택지가 하나라도 더 있다면 1초의 고민도 필요 없는 정도.


 오늘의 주인공인 비빔밥의 결은 조금 다른데, 우선 모든 각각의 맛있는 나물들과 좋은 참기름, 고추장 등을 서로 버무려 조화가 되어 풍미가 더 끌어올려진다라는 사람들의 의견과는 달리 내겐 이 음식의 피날레가 마치 '파괴의 행위'처럼 보였다. 저 맛난 것들을 도대체 왜 비비는 걸까. 밥과 국, 달걀 프라이 그리고 저 나물들을 각각 먹으면 얼마나 하나하나의 맛을 느끼며 행복할까? 고추장을 엄청 넣어 이미 간이 되어 있는 반찬들을 공격해 '고추장, 양푼에 있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장악하다!'라는 뉴스에 나올 법한 무시무시한 파괴의 과정을 보는 게 마음이 편치 못했다. 엄청난 고추장의 공격 덕에 비벼진, 이제 느껴지는 거라곤 나물의 식감-그들 고유의 색감과 간은 이미 사망한 상태-과 고추장과 참기름의 고소함과 맵싹한 감칠맛만 남을 뿐. 다양성이 죽어버렸다.. 도대체 왜 그 이쁘게 담긴 것들을 무자비하게 비벼 원래의 좋은 맛을 포기하고 뜬금없는 빌런, 고추장씨의 등장으로 슬프고 허망한 결말을 짓는 것인지. 이처럼 나는 비빔밥 자체의 맛 자체를 싫어한다기보다 그 과정-음식을 정성스레 각각 하고 다시 모두 섞어 강제 통일시켜 버리는-에 이질감을 느꼈달까? 너무나 유명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도 스트레스받은 주인공이 양푼에 온갖 반찬들을 다 때려 넣고 와구와구 먹으면서 소주를 맛깔나게 마시는 장면이 있다. 스트레스나 화가 난 상황에서 다 비벼서 먹으면 좀 기분이 나아진다고 하는 글이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종종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 애정하는 비빔밥의 '힘'일까? 괜찮았던 하루가 어떤 일로 갑자기 예고도 없이 와라락 무너지며 멘털이 탈탈 털리는 우리들의 화나고 울적한 순간들을 치유할 당장의 방법이 없으므로 응급처치처럼 냉장고에 있던  온갖 반찬과 밥을 큰 그릇에 붓고 분노의 색으로 시그니처라 할만한 고추장 레드를 잔뜩 투하하여 비벼서 먹어 치우면서 그 순간만은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걸까? 분명 심리적 요인이 있을 것이다. 다 때려 넣고 다 비벼! 이 마법의 문장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화가 나면 음식으로 풀려는 경향이 많은데 보통 아주 매운 음식으로 나의 감정의 불을 당장 끄는 대신 혀에 불을 내어 관심을 돌리는 편이다. 일전에 이것 또한 일종의 '자해'라는 말을 듣고 난 나를 해치지 않겠다 마음을 고쳐 먹고 요새는 아무 글이라도 쓰면서 이너피스를 다시 찾는 편이다. 그래서 비빔밥 자체의 레시피는 동의하지 않지만 비빔밥이 왜 사랑받는지는 이해가 된다.


 이런 비빔밥 헤이터인 내가 갑자기 생각을 달리 한 계기랄까? 세월이 흐르면서 그저 평가에 너그러워진 거랄까? 아니면 점심 메뉴로 종종 나오는 비빔밥을 강제로 먹다 보니 어느새 나도 비빔밥과 조금은 친해진 걸까? 이게 비빔밥의 매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비빔밥에 관한 호불호에 변화가 있었다. 최근 쇼츠를 보다 학교, 학원 회사에서 모두가 재료들을 하나씩 맡아서 가져와 대왕 그릇에 다 넣고 팍팍 섞어서 맛있게 덜어먹는 영상들을 보았다. 그 장면은 내가 생각하는 "비빔밥=고추장의 나물과 밥을 향한 습격"이라고 여겼던 원래의 생각과 다르다고 느껴졌다. 따숩다. 귀엽다. 재밌다. 멋지다. 사랑스럽다. 이내 곧 다른 영상으로 옮겨가고 나는 곧 내가 비빔밥 영상을 흥미롭게 봤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이번 주의 일이다. 오늘은 뭐 먹지? 비밀이지만 밥 메뉴 고르는 게 하루 중 가장 진지하고 중요한 고민인데 뜬금없이 떠오른 비빔밥! 그렇다. 나도 먹고 싶은 것이 느닷없이 또렷한 계시로 내려오는 먹보다. 이럴 수가. 나의 계시에 비빔밥이 나오다니. 이게 뭐 대수냐 하신다면 몇 년간의 배달앱 내역을 다 보여드릴 수도 있다! 물론 메뉴를 확인한 후 예상 반응은 참 다양하게 맛난 걸로 잘 먹고 사는구나 하실 테지만 요지는 어떤 가게에서의 주문 내역에서도 비빔밥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내가 비빔밥을 시켰다? 시키면서 분명 나 후회할 텐데? 정말 한참을 결정을 못하고 주문을 누를까 말까 한참 고민을 하다 급한 업무가 생겨 핸드폰을 바로 닫고 일을 하다 5분 후에 다시 보니 아차... 핸드폰을 닫으면서 주문하기를 눌러버리고 결제가 되었다. 핸드폰 당신... 너무 예민해... 그렇다. 스쳐서 결제될 정도의 사건이라면 이건 먹어야 하는 거다. 그래, 간만에 별미로 먹어보자. 맛없으면 다른 거 시켜줄게! 억울하게 결정됐다고 따지는 다른 자아와 협의 후 비빔밥이 왔고 비장하게 비비고 먹기 시작했다. 굉장히 흥미로운 게 이 식당 이름이 우리 동네 이름을 딴 'oo비빔밥'이었는데 사실 이왕 시킬 거 체인 말고 개인 음식점에서 먹어보고 싶었고 그래도 우리 동네 이름을 넣어서 가게명을 지었는데 보통은 하겠지 믿어버리는 아주 단순한 인간. 간단하고 쉬운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마케팅에 농락당할 이 사람. 그래도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속을 수도 있는 가게명을 믿고 주문을 했다. 결론은 이 식당은 우리 동네 이름을 마음껏 써도 되겠다. 맛있다. 내게 비빔밥이 맛있다. 미리 양이 조절되어 들어있던 고추장은 거칠지 않게 부드럽게 나머지 재료들을 감쌌다. 파괴의 맛이 아니었다. 서로를 다독여 주는 그런 느낌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완숙과 반숙을 고를 수 있게 옵션을 넣어주신 사장님의 세심함도 좋았다. 같이 온 우동 국물도 진하지만 짜지 않고 비리지 않고 딱 좋다. 나의 피로한 하루를 달래주다니. 제법이다. 연신 낮은 만족의 소리를 내며 비워가면서 스스로를 설득하듯 말해 본다.


"나 어쩌면 비빔밥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겠어."  


그리고.

오늘 또 oo비빔밥에서 비빔밥을 시켰다. 똑같이 반숙 프라이를 곁들인.

역사적인 주간이다.


올해엔 제일 싫어하는 음식의 목록이 이렇게 하나 줄었다.

비빔밥 헤이터. 이젠 안녕.

비빔밥에 영혼이 있다면 매우 으스대면서 내게 이렇게 속삭일 것 같다.

"너도 결국. 늦었지만 그래도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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