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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페어'란 무엇인가? (1)

작품을 판다는 것

by 이영선

우연한 계기로 4월 3일부터 6일까지 부산벡스코에서 열리는 BAMA 아트페어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아트페어에 대해서 잘 모른다. 내가 아트페어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하는 순간 주변에서 아트페어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다양한 시각이 있었다. 유튜브에 보면 아트페어에 관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여러 가지 의견과 정보가 떠다닌다. 나는 그냥 내가 한 번 경험해 보기로 했다. 나의 경험이 모두의 경험치와 같지 않고, 또한 내가 경험에서 얻고자 하는 목적이 다를 때에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조언은 모두 의미가 없어진다. 어쨌든 시각예술을 하면서 죽기 전에 아트페어를 나가 보았다는 것은 나름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살면서 아트페어에 나가 본 사람? 그게 대단한 것이든 아니든, 그런 경험이 내 인생에 있다는 것은 나쁜 일 같지 않아 보였다.


작품을 하면서 판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작품을 파는 것이 나쁘다거나 안 되는 행위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나는 타인과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작업을 한다. 그게 타인에게도 공감이 되고 타인의 경험이 되면 작품이 소통이 되는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의 영혼을 표현하는 작업을 하면서 팔리고 말고를 생각하는 그 단계부터는 작품이 아니라 상품을 만드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순수성, 예술이 지닌 그 치열함과 열정의 에너지가 사라지기가 쉽다. 그건 작품을 하는 사람들이면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작품을 '사고파는 것'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그런 시각 때문에 나를 포함한 일부 예술가들은 아트페어라는 것에 은근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작품을 판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당연히 내게는 산정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작업의 결과물이 나의 외부세상에서 돈이라는 객관적 수치로 가격이 매겨질 만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작품 자체의 가치보다는 작가의 인지도나 각종 제도상의 이력의 많고 적음으로 작품에 숫자가 매겨지는 관행을 모르고 있지 않다. 자유로운 영혼 덕에 제도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요구하는 이력의 포장지를 덕지덕지 묻히고 있지 않은 내 작품은 당연히 내게 소중한 만큼의 가치가 세상에서 매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고 나의 소중한 시간과 삶과 사유의 표현물이 단지 세상의 시각으로 허접하고 시원찮게 폄하가 되면서까지 시장의 거래상품으로 놓아져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자식과 같은 작품이라고 할 때, 학교 성적 순위나 직장의 수입액 등으로 숫자가 매겨진 자식의 가치가 그 부모에게도 단지 그만큼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일까? 부모에게 자식은 절대적인 가치이다. 자식이 못나든, 머리가 나쁘든, 그 자식은 비교불가능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질 것이다. 나에겐 소중한 자식을 뻔한 세상의 제도에 밀어 넣어서 괜한 자괴감을 들게 하고 싶진 않은 심정이랄까?


어떤 사람들은 또 내게 아예 대놓고 '왜 작품을 팔지 않느냐'라고 묻기도 했다. 나는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나는 판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어서 안 판다는 소리도 한 적이 없고, 누가 산다고 달려든 적도 없는데 왜 그런 소리들을 하는지 궁금했다. 왜 작품을 팔지 않느냐고 묻기 전에 당사자가 내 작품을 사려고 하기나 했으면 모르겠는데, 본인이 사고 싶은데 비쌀 까봐 못 사니 돌려서 말을 하는 건가도 싶고, 아무튼 본인이 사고 싶었으면 팔라고 직접 문의하면 되지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팔고 말고의 얘기가 부정적으로 들리는 가장 싫은 경우는 바로 다음의 경우이다. 사람들은 작품을 보러 와서는 나나 작품에 대해서 궁금해하기보다는 '팔리냐 마냐'를 먼저 물어보고, 내 가족 중 한 명은'안 팔리는데 왜 그리냐'는 식으로 무례한 핀잔을 주기도 하고, 팔리는 작가들의 가격과 나의 작품을 비교하며 돈과 작품의 가치를 비교하듯 평가하는, 무례함을 넘어 선 무식함에 참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단한 작품들은 세상에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누군가 그냥 끄적인 모래 위의 그림, 내게 무용을 배우다가 나를 그린 어느 학생이 그려 준 낙서 같은 그림, 어느 미술학원 벽에 걸린 아이의 그림, 이 모든 것의 가치는 비교불가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며, 실제로 예술적으로도 심지어는 몇 십억까지 호가하는 진부한 그림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취향에 시장의 금액이 얹히는 게 참으로 불편하고 기분이 불쾌해진다. 팔리는 것의 가치가 그 작품이 갖는 예술적 가치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베스트셀러가 그 도서의 질적 가치까지 대변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모두가 학습지나 수험서적만 만들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내게 예술은 돈을 벌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역으로 나는 예술을 하기 위해 돈을 벌고 삶을 집어넣었다. 지금은 예술을 하는 시간을 더 필요로 해서 돈을 버는 행위도 거의 멈췄다. 현재까지 내게 예술은 그랬다. 앞으로는 예술로 돈을 벌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술은 돈을 떠나 우선은 내게 살기 위한 행위이다. 세상에서 어떤 것도 내게 숨을 불어넣어 주지 못했을 때, 예술이 내게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숨은 생명이고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내게 가장 소중한 시간, 재화, 에너지를 다 주고서도 나는 이 숨줄을 붙잡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삶의 부산물이 나의 작품들인 것이다.


이 가시적 부산물들이 많이 쌓이기 시작했고, 이 작품들을 전시에서 보고 여러 가지 각자의 이유로 갖고 싶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이들은 작품을 파느냐고 물어봤고, 그다음엔 가격이 얼마냐고 물었다. 나는 여기에서 대화를 보통 진전시키지 못했다. 작품을 파는 것과 가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좋았던 분위기에 돈 얘기가 오고 가는 것이 왠지 매우 민망하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작품을 팔아야 한다면 중간에 에이전트처럼 전문가를 거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작품이 내 작품이니까 당연히 좋고 꼭 팔아야 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팔아도 되는 무엇이라고 사람들이 말을 해줬고, 내가 작품을 줘도 다시 뺏어오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정도의 가격이라면 이 작품들을 좋아해 줄 수 있는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팔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작품을 놓을 자리가 많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한다.


혹자는 왜 하필 아트페어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아트페어만을 내 작품을 위한 통로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작품을 내보이고 팔게 되는 여러 방식이 있지만, 우선은 내게 우연히 주어진 한 가지 방식을 이번에 시도하려는 것이다. 그에게는 굳이 아트페어가 아니라고 부정적인 의견을 표현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이를 경험을 해 본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누군가 구체적인 설명이나 대안을 주지도 않는다. 모두들 실제적 대안은 없이 자기의 경험에 따른 의견이나 조언만 무책임하게 내뱉는 것이다. 아트페어가 말 그대로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규모 있는 장터라는 의미가 아닌가? 확률로도 더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작품이 있어야 작품을 공감하고 소유하려는 사람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다른 작품들과 작가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도 있고 말이다. 세상이 그리 문자로 표현된 것만큼 순수하고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도 내 작품을 세상에 알리고 이를 소통할 만한 더 많은 대상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사회적 소통을 원하는 여느 인간들 중의 하나이다. 대신 그 사회적 소통의 대상과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을 뿐이다.


아트페어에 작품을 낸다고 해서 내 작품의 순수성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아트페어를 위해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실제로 팔리는 지도 궁금하기도 하다. 첫 아트페어에서 작품이 팔릴 거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지만, 우선 경험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아트페어에 나가기 전이지만 이미 많은 것들을 깨닫고 보게 되는 것이 있다. 실전은 항상 가장 빠른 배움의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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