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스튜디오 전시프로젝트 <움직이는 드로잉>
올해 지역 문화재단의 작은 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원래는 시각예술공연으로 지원했는데 준다던 지원금을 소액다건으로 여러 지원자들에게 흩뿌려버려서 공연은 시도도 못하고, 내 작은 작업실에서 오픈스튜디오 전시 형식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물론 소액이라도 지원에 선정된 건 감사한 일이지만, 작업의 가장 본질인 내 움직임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게 다시 기약 없이 미뤄져서 몇 년째 작품이 적체가 되어버리는 상황이 안타깝기도 하고 갑자기 화가 치밀기도 한다. 내 귀한 작품 제목과 기획 콘텐츠를 지원사업에 도용당하는 느낌도 든다. 축소된 기획도 동일한 맥락의 다른 콘텐츠이지만, 추후 내가 원래 하려던 콘텐츠를 구현하려 같은 제목을 써야 할 때 참신한 느낌이 덜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중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관행이지만 못된 비합리적인 관행은 이젠 고칠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를 펼쳐 보이려면, 적어도 100평 정도 이상의 큰 공간이 필요한데, 적절한 공간을 찾을 수도, 대관할 수도 없어서 애가 탄다. 또한 큰 지원사업은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서울을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 가끔 서울만 대한민국이고 그 외의 지역은 같은 나라가 아닌 듯한 느낌을 받는다. 모든 인프라와 좋은 것들이 서울에만 집중되어 있다. 같은 품질을 가지고도 서울을 벗어나면 마치 리퍼상품이라도 된 듯이 나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느낌이다. 똑같은 품질인데 서울에 주소를 두었을 땐, '서울에서 온 사람'이 되어 특별한 대접을 하려는 것 같고, 소외된 지방에서도 좋은 경험을 공유하려 이곳에 자리 잡았는데 오히려 '뭐 모지라서 지방에 있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심지어는 예술 지원금도 거의 5분의 1로 축소가 된다. 작품에 소요되는 비용은 오히려 배가 된다. 지역에는 인프라가 없어서 외부에서 제작 인력을 들이는 비용이 더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방에는 있을 곳이 못 되는 것 같지만, 원래 서울에 있던 사람이 아니면 고가의 부동산 때문에 막상 서울에 있으면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져서 학업을 끝내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 같다. 평등한 줄 알았는데, 세상에는 평등하지 않은 출신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이제야 깨닫고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든다. 그게 나인데 뭐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재벌도 아니고, 재벌이 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의 인생과 존재가치, 나의 작품을 그 누구와 비교해서 가치절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아니, 오히려 그게 현실과 부딪히는 이유이다. 나라는 배경이 가진 것보다 더 값지고 많은 것들이 내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들을 내 외적인 환경에 맞게 작게 재단하거나 자라게 하는 것을 포기할 의도가 전혀 없다. 그래서 경계를 정하고, 작지만 나의 세계가 있는 공간에 주로 머무는 중이다.
오픈 스튜디오라는 작업실 전시도 어쩌면 가장 진정성 있는 작업과정의 공유가 될 수 있지만, 작품에 걸맞은 장소라야 작품이 완성도 있게 보일 수 있는 게 아쉽다. 내년에는 꼭 그간의 작업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장소를 어디에선가 마련하기로 마음먹는다.
<움직이는 드로잉>에서는 ‘움직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작품에 담는다. 작품들은 색채, 몸, 움직임, 선, 공간, 자연 등 다양한 것들이 추상적 형태를 띠고 융복합되는 교차점에서 드로잉의 표현방식을 더욱 유동적으로 확장시킨다.
나의 작품의 특징들 중 하나는 작품이 놓이는 공간이라는 맥락, 혹은 환경도 작품의 일부로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작품은 모듈처럼 매번 다른 공간에 안착되어 다양한 의미와 해석을 불러일으키고, 작품이 놓이는 공간을 새롭게 바꾸어 놓는다. 이것은 내가 안무구성을 할 때 공간을 상상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나에게 완성되거나 미완성처럼 보이는 조각, 혹은 모듈과 같은 작품들은 마치 안무에 있어 무용수를 다루는 것과 비슷한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일면 때문에 나의 작품은 다양한 경계를 넘어 대단히 자유로운 관점의 영역에 존재한다.
평면의 캔버스 위에 놓인, 그려진, 혹은 설치된 조형적 소재들은 모두 제작과 전시를 하는 과정에서 약간씩은 가변적으로 움직이고 변형이 된다. 이 작품들은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요소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이를 그림이나 조형설치물로 뚜렷이 구분 지어 부를 수 없기에 장르 위에서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연광이든 인공조명이든 각기 다른 공간에서 가능한 빛의 요소에 따라 작품의 시각적인 모습이 달라지는 것도 작품을 움직이게 만든다. 인체가 어느 정도 고정된 형태의 골격구조를 유지하면서도, 그 사이에 있는 작은 관절이나 뼈의 리모델링 (성장과 소멸) 등을 통해 움직임의 허용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본 작품들도 작품의 본질적인 형태와 그에 담긴 내용은 크게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의 움직임의 허용치를 갖게 된다. 내가 추구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모습처럼, 작품에게도 최소화된 고정장치를 통해 최대한의 자유, 그리고 심지어는 소멸까지도 허용하게 하는 것이다.
작품들은 내가 움직임을 창작할 때 이를 시각화하거나, 움직임 창작의 보조적인 도구로 활용했던 오브제들에서 비롯된다. 이는 단순히 오브제를 구부려서 놓은 것이 아니라, 실제 이것들을 가지고 춤을 추며 움직이고, 움직임을 형상화하려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의 흔적과 조각(pieces)들을 캔버스 위에 시각화해서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들은 한 시점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다시 다양한 공간으로 확장되고 가지를 뻗을 수 있는 작품들로서, 계속 움직이며 진행 중인 작품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나의 작품은 멈추고 퇴화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연속선 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작품은 여러 경계가 사라진 상태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감각의 구조이다. 나는 몸, 언어, 이미지로 표현하는 세계를 해체하고 녹여내어 ‘이영선’이라는 하나의 살아있는 예술적 언어를 만들어냈다. 이는 기존의 문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언어이자 세계이며, 존재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