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방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으로 더 잘 알려진 한나 아렌트의 책을 다시 읽게 될 줄 몰랐다. 지난 몇 년간 비판적 사고를 강의하고 실습을 진행하면서 한나 아렌트를 가장 많이 인용했었다. 경직된 조직문화에 위계질서가 단단한 군 조직에서 비판적 사고를 가르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아돌프 아이힌만의 사례를 소개하며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을 육군과 같은 둔중한 조직에 역설하는 것은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지금도 어느 한 장교의 질문이 생각난다. ‘교관님은 지금 우리에게 항명을 가르치시는 건가요?’당황스러웠다.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잘 답변해주었다. 지금까지도 한나 아렌트의 주장이 이렇게 논쟁 되어질 수 있다는 점이 그녀가 위대한 사상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번 책은 번역이 다소 무질서해서 그런지 그 내용과 함의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잘 나지 않았다. 원서로 읽은 사람들도 머리를 쥐어짜며 어렵게 읽었다고 한다. 어쩌면 디테일한 시대적 배경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나의 배경지식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찾은 것이 아니라 이 책이 우리를 찾아왔다는 점이다.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고,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군 장성들이 체포되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목격한 한나 아렌트가 아이힌만을 데리고 방한(訪韓)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한나 아렌트의 방한을 절대 가볍게 어겨서는 안 된다. 특히, 군(軍)은 이번 기회에 더더욱 반성하고 다시는 한나 아렌트 선생님이 아이힌만을 데리고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낯설지 않았던 장면들
이번에 <예루살렘의 아이힌만>을 읽으면서 소름이 돋는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2024년 12월 3일부터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너무 비슷한 장면들을 이 책에서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1만 km나 떨어진 독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 이유이다. 낯설지 않은 장면 몇 가지를 대한민국과 나눠보고자 한다. 12월 3일은 내 생일이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생일 선물을 안겨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아이힌만은 자신에게 적용된 15개의 기소 사유 모두를 부인했다. 그는 변호인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신 앞에서 나는 유죄이자만, 법 앞에서는 무죄다.” 또한, 자신이 기소될 때 법적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최근 대한민국에서 계엄 사건에 관여한 일부 책임자들의 발언과 태도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렇게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낯설지 않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을 위한 운명의 전투’라는 구호로 독일 국민을 선동했다. 아렌트는 이 구호가 세 가지 면에서 자기기만 부추겼다고 분석한다. 첫째, 전쟁은 전쟁이 아니라는 암시. 둘째, 전쟁을 시작한 것은 운명이지 독일이 아니라는 점, 셋째, 전쟁은 독일인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적을 전멸시키지 않으면 우리가 전멸당한다는 공포의 조장. 이 논리 구조 또한, 지금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아이힌만은 재판 초반에 선서를 거부했다. 자신이 젊은 시절 배운 단 한 가지는 바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본인은 도덕적인 이유로 선서를 거절했다. 그 누구도 내게 선서를 강요할 수 없다는 궤변까지 늘어놓았다. 그러자 판사가 자신의 변호를 위한 증언을 하고 싶으면 선서를 한 뒤 할 수도 있고 선서 없이 할 수 있다고 말하자 즉시 선서를 하고 증언하겠다고 답변했다. 도덕과 종교를 방패 삼아 책임 회피를 시도하는 태도였다. 아이힌만이 선서를 거부했던 이 장면 또한 낯설지 않다.
#아이힌만의 마지막과 칸트의 그림자
재판을 받던 아이힌만은 칸트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을 언급하기도 했다. 칸트에게 기대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아이힌만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도 읽었다고 진술했다.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칸트의 도덕적 교훈과 의무에 따라 살아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칸트의 제1 정언명령은 도덕적 행동의 기준에 관한 내용이다. “너의 행위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해라’이다. 즉, 개인의 행위는 반드시 모든 이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규범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이힌만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이송하고 학살하는 데 기여한 행위가 과연 보편화될 수 있는가? 국가가 명령하면 인간을 가스실로 보내도 되는 행위는 그 어떤 보편적 윤리로 설명할 수 없고, 모든 이에게 적용할 수 없다.
칸트의 제2 정언명령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우하라고 강조한다. “너 자신과 타인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 대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삼지 말라”이다. 즉, 인간은 결코 국가나 이념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언제나 스스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이힌만이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존엄 그 자체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명령과 행정의 실행 수단으로 취급했다는 뜻이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자기 사유에 기반한 자율적 판단을 전제로 한다. 아렌트는 아이힌만 의 문제를 ‘사유하지 않음’에 두었다. 아이힌만이 칸트의 도덕철학울 따랐다고 하는 주장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행위가 보편화될 수 있는지 성찰하지 않았다. ‘악의 평범성’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악은 사유를 멈춘 그 빈틈으로 서서히 등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멈추면 안 된다. 내가 하는 이 행위가 모두에게 적용되어도 옳은가? 나는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우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사유하고 있는가? 책임이 따르는 자리에 있는 리더로서 나는 올바른 사유를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가? 남을 향한 질문에서 나를 향하는 질문으로 그 방향을 바꿔야 한다.
#평범함과 무사유의 비극
많은 이들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도 사유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라는 정도로 이해한다. 그 자체로 틀리지 않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가 왜 ‘진부함’ 혹은 ‘흔해빠진’을 뜻하는 banality라는 용어를 썼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번 계기를 통해 곱씹어 보았다. 아렌트는 무사유(無思惟)와 자기 성찰이 없는 맹목적 복종이 진부할 정도로 반복되던 당시의 현실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평범성’으로 번역되었을까? 사유의 결여와 비판 없는 복종의 반복이 평범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평범한 누구라도 아이힌만이 될 수 있다는 도덕적 경고와 철학적 충고를 주고자 ‘평범성’으로 번역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는 단순히 아이힌만이라는 인물의 비극적 행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이 사유를 멈출 때 생기는 공백을 비판 없는 복종이 어떻게 메우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아이힌만은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고, 그것이야말로 악의 본질이라는 점을 아렌트는 정면으로 들춰냈다. 그는 괴물이 아니었다. 아이힌만은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고, 바로 그 평범함이 한 시대를 악으로 몰아넣은 조건이었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사유하고 있는가?”그 질문은 지금의 대한민국에도 고스란히 던져진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들이 국가를 상대로 저지른 불법적 시도, 그로 인해 법정에 서게 된 군 장성들,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침묵하거나 방관한 조직, 맹목적인 당파성(partisanship)으로 분열된 사회 전반의 분위기. 집단적 망각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힌만』을 읽으며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악은 항상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악은 사유가 멈춘 그 틈으로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스며든다. 그것은 특정한 이념이나 폭력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의 결여에서 비롯되는 문제다.
아이힌만은 언제나 지시에 충실했고, 행정 절차를 어기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윤리적”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는 무엇 하나 스스로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시스템 속의 부품이었으며, 자신이 돌린 톱니바퀴가 무엇을 짓이겼는지 끝내 고개를 돌렸다. 이 책은 우리가 그런 ‘부품’이 되지 않도록, 그 어떤 체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묻고 사유할 수 있는 시민이 되기를 요구한다.
# 다시
지금의 난 24년의 장교 생활을 무사히 마친 민간인이다. 난 답답할 정도로 순수한 군인들을 사랑했고, 늘 변화를 말하면서도 잘 바뀌지 않던 군대를 좋아했다. 청춘 바쳐 헌신했던 모든 기억을 아름답게 추억하고 싶었다. 깨끗하게 가슴에 묻고 새로운 인생을 활기차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그 다짐을 무너뜨렸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현역 시절에 겪고, 민간인이 되어 관련자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단단하게 묶어 두었던 다짐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렸다. 흩어진 다짐과 생각을 모으고 산산조각이 난 신념을 다시 모으고자 책을 집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힌만』은 그렇게 내게 찾아왔다.
대한민국은 이번 사태를 단지 해프닝이나 정치적 사건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이 잊혀지는 전쟁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처럼, 이번 사태 또한 세월에 묻히거나 흐르는 강물에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무엇을 반성하고, 어떻게 무너진 질서와 분열된 공동체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어떻게 다시 도약할지 집단지성을 발휘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