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 있는 어른이 필요한 시대의 필독서
#열자 마자 덮은 책.
책 표지에 적힌 한 문장,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다산을 읽고 또 읽었다." 이 고백 앞에서 나는 잠시 책을 덮었다. 좋은 책은 자주 덮게 되는 책이라고 했다.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덮게 된 건, 그 문장이 내 마음 어딘가를 진하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흔들리는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줄 리 없다고, 이 무게는 결국 나 혼자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지도, 마음을 열지도 못한 채 깊은 동굴로 들어간 날들이 있었다. 그 어둠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했던가? 대부분은 외면하거나, 그냥 순응하거나,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핑계로 회피했다.
그래서였을까. "다산을 읽고 또 읽었다"는 작가의 고백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다. 부끄러워졌다. 이번만큼은 '궁금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첫 페이지를 열었다. 호기심이 아닌 겸허함으로 품격 있는 어른의 말씀을 듣고자 서늘하게 자세를 고쳐 세웠다.
#정약용 선생의 친절한 해설사
조윤제 작가는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분투적 삶과 성찰의 흔적을 소개해주는 친절한 해설사이시다. 『다산의 마지막 공부(2018)』, 『다산의 마지막 습관(2020)』, 『다산의 마지막 질문(2022)』으로 정약용 선생님의 가르침을 살아 숨 쉬게 했다. 이번 『다산의 문장들』은 다산이 남긴 편지와 글을 토대로, 배움ㆍ고난ㆍ인생ㆍ성찰ㆍ관계ㆍ세상에 관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담았다.
읽는 내내 깊이 새기고 매일매일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들이 가득 담긴 종합 선물세트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총 6편의 바구니에 담긴 다산의 지혜를 모두 펼쳐 보이고 싶을 정도로, 깊고 촘촘한 문장들이 연속적으로 밀려왔다. 이번 다산 시리즈는 가볍게 넘길 글자가 단 한 개도 없었다. 그중 배움에 관한 첫 번째 바구니, 성찰에 관한 네 번째 바구니가 오래도록 마음을 잡아끌었다.
# 첫 번째 바구니 : 배움에 관하여
'배움에 관하여' 는 웅장했다. 배움의 본질을 잊지 않고,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과 올바른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다산은 『상례사전』에서 "자신이 옳지 않다고 믿는 것을 따라야 하는가? 만약 명성과 권위에 눌려 침묵했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자, 자기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산의 결연함이 느껴졌다. 침묵은 때로 한 시대의 고통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일지록』은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대학자 고염무가 쓴 글로 많은 학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 책이었다. 다산은 이 글에 잘못된 부분이 너무 많다는 내용을 담아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고염무의 글에서 진실되고 참된 마음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유행을 좇고 겉치레만 의식한 배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묵묵히 진실된 마음으로 써 내려간 글, 고민과 실천이 깃든 가르침만이 오랫동안 진한 향기로 가슴에 남는 법이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것이 책의 향기이고, 가장 맛있는 것이 글을 쓰는 먹의 맛이다." 부와 권력의 대물림보다 책과 글의 가치를 깨우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무척 어려워 보인다. 대한민국과 같은 입시제도가 있는 교육 시스템에서는 더욱 험난해 보인다.
평가의 노예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돈과 승진에 마음을 빼앗긴 채 직장생활을 한다. 각박한 현실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여유롭게 책과 글이 주는 즐거움을 향유하는 행위는 현대인들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읽어야 한다. 빡세게. 써 내려가야 한다. 진실되게. 빡세게 읽고 진실되게 쓰는 것만이 나를 가두고 있는 담장을 넘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힘들고 외롭다. 함께한다면 생각보다 쉽게 넘을 수 있다. 담쟁이가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높은 벽을 넘어가듯 말이다.
또 다산은 말한다. "배우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배우되, 다 배우지 못했으면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묻되, 알지 못했으면 그만두지 않는다." 200여 년 전에 이미 평생학습의 정신을 밝힌 셈이다. 국회 법사위원회와 일부 지방 법원에는 정약용의 흠흠신서 서문이 걸려있다고 한다. 배움에 대한 다산의 위와 같은 말씀이 교육부와 각 지방 교육청에 걸렸으면 한다.
# 네 번째 바구니 : 성찰에 관하여
성찰의 바구니에서 무척이나 오래 머물렀다. 둘째 형의 부탁으로 재실에 붙일 글을 지으며 다산은 말했다. "나는 뉘우쳐야 할 일이 형에 비해 만 배나 더하니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라고.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불비했던 여건을 탓하고,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뒤에 숨는다. 그게 제일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산은 자신의 유배생활을 원망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춘추전국 시대 제나라의 명재상으로 3명의 군주를 섬긴 '안영'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 그의 언행을 기록한 『안자춘추』에는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구절이 있다.
어리석은 자는 후회가 많고, 부족한 사람은 스스로 현명한 줄 안다. 물에 빠진 자는 물길을 살피지 않았고, 길을 잃은 자는 길을 묻지 않았다.
되새기고, 되뇌고, 곱씹어야 하는 문장이다. 매 순간 나의 모든 행동이 언제나 잘못된 일이라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잘못한 게 명백한데 인정하지 않고 남 탓만 되풀이하는 사람은 결국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성찰은 살아 있는 사람의 일이다.
『예기』(오경(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중 하나로, 예법의 이론과 실제를 풀이한 중국의 경전)에서는 "군자의 사귐은 맑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단술과 같다"고 했다. 진정한 벗이란 담백한 진심과 서로를 향한 바른 충고 속에 말은 물처럼 오래가는 사람이다. 이 말을 듣고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담백하고 맑은 물처럼 오래가는 벗이 되었는가? 되어주고 있는가? 그런 벗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는가? 나를 바로 세우고, 덕을 쌓고,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면 진정한 벗이 찾아오지 않을까?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다.
#다산 시리즈의 부제 묶음
다산의 문장들을 다 읽고 다산 시리즈의 부제들을 떠올려 봤다. 각각의 부제는 다음과 같다. 『다산의 마지막 공부』 - 마음을 지켜낸다는 것, 『다산의 마지막 습관』 - 기본으로 돌아가라, 다산의 마지막 질문 - 나를 깨닫는다는 것, 『다산의 마지막 문장들』 - 단단하게 나를 지키며 품격 있는 어른으로 산다는 것. 이들을 엮어 한 문장으로 만들어봤다. 아름답고 눈 부신 문장이 탄생했다.
올바른 공부는 자신의 마음을 굳건하게 지키기 위해 해야 하고, 이렇게 얻은 지식을 삶에서 실천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기본으로 돌아가 항상 본질에 충실하는 것이며, 이를 실천하는 지식인은 언제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아, 스스로를 단단하게 지키며 품격 있는 어른으로 살아간다.
#품격을 지닌 어른을 갈망하며...
우리는 언제나 어른다운 어른을 갈망해 왔다. 이 시대의 큰 어른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에 문형배 전 재판관을 통해 알려진 김장하 선생님이 떠오른다. 다큐의 제목도 '어른 김장하' 였다. 정약용 선생님의 글과 향기는 지금도 깊고 잔잔한 향기로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그야말로 품격 있는 큰 어른이셨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와 가까운 주변 사람부터, 멀리 있거나 오래전 이름들을 돌아보았다. 지금의 각박한 현실을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 중 '품격 있는 어른' 이 몇 분 떠올랐다. 그분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현재를 살아가지만 언제나 우리가 바라는 미래를 먼저 생각하며 결정과 선택을 했다. 과정의 정직함을 중시했다. 누가 되었건 지위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배우고자 했다. 그분들의 노력 덕분에 내가 몸다고 있었던 육군이라는 매우 둔중한 조직이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도 그런 분이 가까이에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지금 어떤 어른인가?
맹자는 어른을 이렇게 정의했다. "어른은 스스로를 바르게 함으로써 만물을 바르게 사람이다." 자신은 바르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만 요구하는 사람, 평소에는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비겁해지는 사람, 사회적 지위와 명성은 있으나 내면이 허물어지고 찌든 사람은 진정한 어른이 아니다.
정약용 선생의 말들은 자연스럽게 질문의 화살을 나에게 돌린다. 정약용 선생의 가르침대로 나는 품격을 갖춘 어른이 되었는가? 누군가로부터의 평가가 아닌 오로지 나 스스로의 자기 객관화 관점에서 말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정약용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그동안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깨달은 지혜를 삶에 온전히 녹여내는 '실천'이 부족했다. 진정한 어른, 품격 있는 어른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무척 고단하고 외로운 여정이다. 그렇다고 그 험난한 여정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정약용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우리의 행동과 삶에 따라 우리가 사는 나라의 품격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다산은 『거가사본』 - 다산의 대표적 산문집으로 청소년을 위해 집필한 4가지 실천 윤리 교육서- 에서 선행을 가로막는 행동을 지적한다. 『논어』에서 말하는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라는 말과 맞닿아 있다. 다산은 옳음을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은 옳은 일 하나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쁜 일 하나를 하는 행위임을 명심하라고 가르친다.
품격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우리는 빡세게 성찰해야 한다. 자기반성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내가 완전한 어른이 될 자신이 없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의 성장을 시기하고 막아서는 어른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책을 덮고 난 뒤, 다시 시작되는 배움
언제나 그랬듯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책을 처음 열던 그때로 돌아가본다.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누군가의 문장을 찾아 헤매던 나에게, 다산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스스로를 바로 세울 기준을 세워주었다. 배움에서 성찰로 이어지는 다산의 가르침은 결국 '품격 있는 어른으로 산다는 것' 이라는 한 문장으로 모였다. 거창한 덕목이나 새로운 가르침이 전혀 아니다. 제대로 공부하고, 깨우친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옳음을 알면 머뭇거리지 말고, 언제나 스스로를 먼저 바르게 해라!
책을 덮고 다시 표지로 돌아와 나를 멈추게 했던 문장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품격 있는 어른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늘 배우고 고치고 성찰하는 과정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산의 문장들』은 오래 묵혀 두고 매일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제 다시 일상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다산이 남긴 문장들은 오래도록 내가 붙들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