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후, 엄마 진짜 힘들어 죽겠어. 하루종일 일하고 집에 와서도 일하고~" 아이들이 어질러 놓은 잔해들을 치우다 나도 모르게 들으라는 듯 혼잣말인 듯 푸념을 늘어놓았다. 듣는 사람은 어차피 애들밖에 없는데 괜한 소리를 했나 생각이 들던 차에...
"어이구, 잘했네! 잘했어!" 내 엉덩이를 세차게 두드리며 구수하게 응원을 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우리 집 둘째 뽀뽀. 특유의 사랑스러움으로 숨만 쉬어도 칭찬을 받더니 이렇게 적절한 타이밍에 엄마를 위로해 주는구나. 표현에 인색한 나도 아이를 대할 때에는 의식적으로 과하게 오버액션을 하곤 한다. 우리 아이들이 칭찬받는 아이로 자라는데 크게 기여한 일등공신이 또 있는데 그는 바로 아이들의 외할머니, 우리 엄마다.
엄마가 내 아이를 칭찬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내가 기억도 못하는 어린 아기일 때 엄마가 나에게 저렇게 칭찬을 해 주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엄마에게 칭찬받은 기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국민학교 1학년 2학기 첫 시험에 전 과목에서 4개를 틀렸다고 눈물 빠지게 혼이 났던 기억은 생생하다. 엄마가 아이를 혼내는 방식은 너무나 감정적이라 억울함은 아이의 작은 가슴에 산처럼 쌓아 올려졌다. 딱 지금 내 나이였던 당시의 엄마에게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으로는 고된 인생의 보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들은 그렇게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냈고 그들을 부모로 둔 우리들은 항상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면 살았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실패를 경험하면 내가 가진 알량한 것들이 모두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어떤 시도도 하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평균을 보장해 주는 삶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했고 원하는 바를 이뤘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도 행복하지가 않았다. 성장호르몬이 왕성히 분비되는 20대에 '실패를 두려워하는 겁쟁이'인 사실에 수긍하고 도전하지 않는 삶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내가 실패를 두려워한 사람이 된 이유를 전적으로 엄마에게 돌리자니 미안함과는 별개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으로서 성공하는 것을 지금처럼 주목하지 않는 시절이었다. 오히려 실패하면 골로 간다는 의식이 팽배했다. 그 시절엔 왜들 그렇게 서로 보증을 서 줬는지 빨간딱지로 상징되는 압류, 차압이 동네에서 심심찮게 보였다. 어린 나조차도 우리 집이 망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우리 엄마가 망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은 시대의 굴레 때문이지, 엄마가 부족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엄마는 단지 엄마가 볼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세상을 나에게 보여줬을 뿐이다.
오랜만에 둘째와 단 둘이 있게 되어 큰맘 먹고 아이와 놀아주기로 했다. "엄마랑 같이 놀자!"라는 말에 아이는 단번에 인형놀이 장난감을 가져온다. 학교를 세트로 꾸며놓고 인형놀이를 시작했다. 아이와의 인형놀이는 그냥 아무말 대잔치다. 맥락 없이 상황이 주어지고 되는대로 떠들고 엉성하게 마무리된다. 뽀뽀의 인형이 갑자기 "그런데 선생님이 실험실로 오라는지 급식실로 오라고 했는지 내가 잘 들었는지 모르겠어."라고 말을 했다. 나의 인형이 대답했다. "그럼 한 번 가보면 되지, 뭐."
아! 그 순간 내가 그토록 실패를 두려워하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집에서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우리 세대는 "한 번 해보지, 뭐."가 허용되지 않았다. 실수로 수업하는 교실을 잘못 찾아가기라도 하는 날엔 호된 꾸지람이 돌아왔다. 우리가 놓였던 환경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에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윽박질렀다. 우리는 항상 잔뜩 겁에 질려 긴장한 채로 '실수하면 안 돼' '틀리면 안 돼'를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반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며 선생님한테 혼나는 친구를 볼 때면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숨 막히는 학교에서 벗어나면 어른의 자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진정한 어른의 자유는 성공의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성공을 위해서는 수백 번의 실패를 경험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나는 한 번의 실패도 버티기 어려운 약하디 약한 멘탈을 장착하고 사회로 나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실망하며 상처받았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천지 삐까리다. 아이들이 풀기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다 짜증을 벌컥 내기라도 하면 코딩된 로봇처럼 "한 번 더 해 보면 되지."라는 말을 해 주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알겠다. 그 말이 제일 필요한 사람은 말하는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