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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심야영화!

다시, 금요일 밤에 영화를 보기로 했다.

by 영백

씨네필을 꿈꾸며 학교처럼 극장을 드나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씨네필, 영화광이라는 말도 이제는 구시대의 언어가 되어 버렸죠?


영화는 나에게 세상을 비춰보는 프리즘 같은 것이었어요. 마음이 힘들었던 어린 시절, 내 눈에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어요. 그런데 영화를 통해 본 세상은 올칼라 총천연색이었죠. 그 생경하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영화 속 주인공에 동화되어 온몸으로 경험했어요. 시간과 공간, 언어의 장벽 따윈 문제가 되지 않았죠.


극장 안의 조명이 꺼지는 순간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에 불이 다시 켜지면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왔지만요. 하지만 극장 밖으로 나와 바깥공기를 깊게 들이 마실 때면, 분명히 느낄 수 있었어요. 나의 세계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는 것을.


그래서 참 열심히 영화를 보러 다녔어요.


눈부신 설원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애타게 부르짖던 후지이 이츠키 상, 기억하시나요? 네! 바로 영화 '러브레터'입니다! 친구들과 작당모의를 해서 야자 땡땡이치고 눈 오는 날 봤던 영화! 영화의 마지막, 후지이 이츠키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네요.

수능이 끝나고 '봄날은 간다'를 봤는데요. 지금은 없어진 종로 3가 시네코아에서 영화를 보고 나와 길을 건너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아직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명대사가 나왔었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때 사랑 한 번 해본 적 없었던 여자애는 종로 한복판에서 꺼이꺼이 울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네요. '사랑은 변하는 거야.. 바보야.... 그나저나 재수해야 하나?'

재수는 안 하고 대학에 갔습니다. 그전보다 더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죠. 방학이 되면 매일같이 109번 버스를 타고 안국동으로 갔어요. 서울아트시네마가 그때는 안국동에 있었거든요. 비정성시를 보러 갔던 날, 영화를 보다 기절했는데 일어나 보니 영화가 끝나 있더라고요. 예술영화관에서는 이상하게 집보다 더 잠이 잘 왔어요. 영화가 끝난 후 극장 바로 앞에 있는 '라면 땡기는 날'에서 영화 한 편 더 볼까, 말까? 고민하며 맵디 매운 라면을 후루룩 들이켰습니다.


글이라고는 일기도 쓰지 않던 나. 정리엔 쥐약이라 예전 사진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 이런 나에게도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고 머물렀던 공간을 담아내는 나만의 기억법이 있더라고요. 그건 바로 '영화'였습니다. 그렇게 영화 한 편이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써 내려가며 차곡차곡 쌓여 왔습니다.


대학에서는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었어요. 어느 날 졸업한 선배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무슨 영화를 봤는지 경쟁적으로 떠들고 있는 우리들에게 한 선배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영화 보는 것도 다 한 때야. 보고 싶어도 못 봐."

그러시냐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본인이 영화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거지, 그게 무슨 말이냐며 코웃음을 쳤어요.


그런데 수년 후, 저 역시 영화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30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34살에 아이 엄마가 되면서 그 이후 지금까지 딱 8년이네요. 8년 동안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어요. 출산 전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2016년작 곡성(공포영화를 좋아해서 만삭 때도 보러 갔답니다.). 그 이후로 극장에서 본 영화는 '뽀로로 보물섬 대모험'이었으니 말 다했죠, 뭐. 이따금씩 한 두 편 보기도 했겠지만 무슨 영화를 봤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요. 영화는 더 이상 나에게 시간과 공간을 기록하는 나만의 기억법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하죠. 내가 의미를 주지 않았으니까요.


회사로, 집으로 오가며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는 와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나의 즐거움을 위해 하는 일이 뭐가 있지?'

두 아이의 엄마로서,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시간은 고된 만큼 보람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쑥쑥 커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보상이 되거든요. 하지만 솔직히 즐겁지는 않습니다. 회사에서 강대리로 사는 시간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고맙지요. 일하는 덕분에 우리 가족이 지금처럼 생활을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즐겁지는 않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일주일에 7일, 한 달 30일, 1년 365일. 나의 즐거움을 위한 시간이 한 톨도 없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내 나이 마흔 하나. 더 늦기 전에 나의 즐거움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 그런데 나는 뭘 하면 즐겁지?


뭘 해본 적이 있어야지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물건을 사면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도 손에서 놓은 지 오래, 회사와 집 밖에서 무언가를 해본지도 오래. 나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십수 년 전, 입사하자마자 지방으로 발령이 났어요. 금요일 퇴근 후 상경길은 정체가 극심합니다. 차 안에 갇혀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정이 가지 않는 사택으로 향했습니다. 유통기한이 남지 않은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TV로 생중계되는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보았습니다. 온국민을 사로잡은 김연아 선수보다 나를 설레게 하는 건 따로 있었어요. 그날 내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영화 '트로픽 썬더'의 금요일 마지막 상영타임. 정체가 풀리는 시간이 되면 당장 뛰어나갈 겁니다. 그 영화, 정말 병맛이던데!! 진짜 재밌다던데!! 생각만으로도 두근두근합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월화수목금 5일간 쌓인 긴장과 피로를 위로해 준.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았지만, 외롭지 않았던. 영화와 함께 순수하게 즐거웠던 시간들.

정했습니다. 이제, 금요일 밤에 영화를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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