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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을 좋아하세요?

졸지 않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끝까지 봤다.

by 영백

'우연히, 웨스 앤더슨'이라는 전시회의 이름을 들었을 때 무척 반가웠다. "나, 웨스 앤더슨 정말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이 전시는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의 영화와는 그닥 관련은 없었지만.

한 때 좋아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 시절의 기억이 왈칵 몰려온다. 그래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의 영사기가 촤르르르 돌아가며 몇 조각의 기억들을 소환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가 상영되던 극장의 냄새, 그때의 날씨, 영화를 보면서 나른했던 기분, 옆에 있던 사람(... 은 없었음)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웨스 앤더슨은 좋아한다기보다 좋아하고 싶은 이름이었다. 멋진 것을 보고 멋있다는 느낌만 캐치하고 왜 멋있는지는 잘 몰랐던 스무 살. 스무 살의 취향이라는 땅은 이제 촉촉히 물기를 머금고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새싹 주제에 아름드리나무를 동경했던 나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발견하고 좋아하고 싶은 마음을 강렬하게 느꼈다. 씨네 21의 개봉영화 십자평을 가득 채운 별의 개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고 싶어하는 그의 영화, '로얄 테넌바움'.

제목도 왠지 멋있다! 포스터를 꽉 채운 배우들은 뚱하니 시크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래도 안 보러 올 거야?'라고 하는 것 같았다.


오후 강의가 없는 어느 날, 영화관을 찾았다. 같이 보러 간 사람이 없기에 눈치 보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한참 자고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스크린 위에 펼쳐진 영화의 장면 장면은, 무척 아름다웠다. 왜인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랑스러워서, 잠이 들었다는 사실조차 무색해져 버렸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이 예뻐 보였고, 스모키한 눈화장을 한 기네스 팰트로도 참 매력적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 극장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내가 비록 잠이 들긴 했지만,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고야 말겠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겨우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 구했지만 내 컴퓨터 하드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재생은 되지 않았다. 책을 산 순간 다 읽은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 병이 영화에서도 적용됐다. 이런 사정이라 웨스 앤더슨을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영 꺼림칙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취향 허세꾼이다.


그리고 십이 년 후, 30대 기혼 직장인으로서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사정없이 털리고 있었던 때, 지금 내게 온 것이 삼재인 걸까? 질문하는 와중에 웨스 앤더슨의 바로 그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개봉됐다. 이 영화를 본 전후 사정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물리적, 심적 여유가 한 톨도 없었던 때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봤다는 것은.. 웨스 앤더슨을 좋아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극장에서 세상 편안하게 잠을 잤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 장면들은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더 아름다웠다. 독특한 구도와 블링블링한 색감, 예쁜 촬영 세트처럼 잘 만들어진 듯한 배우들의 연기.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이 이렇게 완성되었다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영화가 결국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뭔지 잘 모르겠는 건 내가 잠깐 잠이 들어서겠지? 왠지 그의 영화를 한 편 더 보고 나니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이제는 좋아한다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누군가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대해, 웨스 앤더슨이 만든 그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일은 전혀 없었다.



오래전 '좋아하고 싶은' 폴더에 넣어 두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다시 꺼내 보았다. 아이 둘을 키우는 워킹맘으로 하루하루를 불태우면서 살고 있지만, 극장보다 집중도가 떨어지는 거실 TV로 영화를 보지만, 이번에는 졸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나는 이 영화의 멋에 대해서, 웨스 앤더슨의 세계에 대해서 쫑알쫑알 떠들 수 있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도, 음악도 취향에 관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십 년의 시간을 지나왔음에도.


아름드리나무를 동경했던 풋내 가득한 스무 살의 나에게 말해 주고 싶다. 그렇게 내 것으로 만들려고 동동거리지 않아도 어느 순간에는 저절로 무르익게 되어 네 손 안에 떨어질 것이라고. 그러니 그냥 마음이 향하는 대로 걸어가 차곡차곡 쌓아 나가라고.


이제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 나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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