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초콜릿 냄새가 진동을 하네요.
팀 버튼이 만들고 조니뎁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2005년에 세상에 나왔다. 당시 이 두 사람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가위손'의 풋풋한 충격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아이들을 위한 영화였지만 어른들이 더 기다린 영화이기도 했다.
2005년이라 하면 대학시절의 잉여력이 정점을 찍었던 때로, 한창 영화를 많이 보던 시절이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갔다. 꿈에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애들이 한 다스로 나왔다. 상대적으로 주인공인 찰리는 가난하고 착해 빠져 특색이 없었다. 단발머리를 한 조니뎁은 왜 자꾸 허리케인 블루가 생각나는 거지?(허리케인 블루를 모르시는 분들, 죄송합니다.) 이 정도 감상과 얼굴이 다 똑같이 생긴 움파룸파족의 테크노 춤사위의 잔상을 남겨두고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기억의 서랍 저 한편에 고이 모셔졌다.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원작은 전 세계가 사랑한 이야기꾼 로알드 달의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다. 이 소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내 유년시절의 독서력은 중간이 뻥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는 책 장수가 있었다. 엄마는 어느 날 그 책 장수에게 전집 몇 질을 덜컥 샀다. 홀로 집에서 뒹굴거리다 심심해 죽겠다 느껴질 지경이면 듣보잡 출판사에서 펴낸 조악한 그 책들을 집어 읽곤 했다. 하지만 이내 날 사로잡은 건 아이큐점프, 나나 같은 월간 만화잡지였다. 어느 날에는 특별부록으로 '루이제와 로테'를 작은 책자로 증정했다.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살다 우연히 만나게 된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어쩌다 방문한 사촌 동생의 집에 '산적의 딸 로냐'가 있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우연히 읽게 된 책 외에는 오랫동안 널리 널리 사랑받은 어린이들을 위한 명작을 거의 읽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십 년 전의 초등 저학년들은 어른의 도움 없이는 좋은 책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지금처럼 동네마다 작은 도서관이 있지 않았고 책을 소개하는 채널도 거의 없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 외의 책은 구경도 못했고(도서실이란 곳이 있기는 했었겠지? 왜 그때 선생님들이 독서교육에 무지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꽤 먼 곳에 위치한 도서관을 가려면 껌 좀 씹는 언니오빠들이 지키고 서 있는 골목길을 지나가야 했다. 안타깝게도 나의 부모님은 책과는 담을 쌓은 인생을 사셨다. 그렇게 나는 어린이문고의 문외한으로 자랐다.
그랬기에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나에게 어떤 동심도 환기시키지 못했다. 사실, 나의 동심이 무슨 색깔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였다. 내 아이들이 그림책에서 글책으로 넘어가는 지금 이 시점에 아이들에게 어떤 책을 이야기할지 아득했던 이유는. 가뜩이나 스마트폰 때문에 유튜브와 게임의 자극적인 재미에 벌써 눈을 뜬 아이들이 재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점심시간에 잠깐 들른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어린이 코너를 서성이다 익숙한 제목의 책을 집어 들었다. 바로 '찰리와 초콜릿 공장'. 별생각 없이 고전이니까, 집에 두면 언젠가는 애들이 읽지 않을까? 란 생각으로 사 왔다. 책을 전해 주며 '바로 영화를 같이 볼까?'란 생각도 들었지만 영화부터 보면 책은 영영 안 읽을 것 같아 그 생각은 고이 접어두었다. 십 수년 전 본 영화에 대한 기억은 가물했다. 아이들과 함께 다시 본다면 나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뒤, 초등학교 2학년인 큰 아이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쾌재를 불렀다. 동시에 의아함도 느꼈다. 흔한 남매와 포켓몬카드를 끼고 사는 2020년대 대한민국 잼민이가 60년 전에 태어난 이야기에서 발견한 매력은 뭘까?'
"엄마, 이 책 진짜 재밌다!"
"그래? 어떤 점이 재밌는데?"
"몰라~그냥 재밌어."
그래, 재미는 원래 그냥 느끼는 거지.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기 전에 이미 느껴지는 원초적인 감정인 것을. 영화를 보고 느끼지 못했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라는 이야기의 진짜 매력을 발견하고 싶어 책을 폈다. 옴마나, 1960년대에도 내 새끼 오냐오냐하며 잘못 키우는 엄빠들이 사회문제였나 보다. 움파룸파의 노래 속에 애들보다 부모가 문제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을 보니.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나부터를 외치는 초콜릿 공장의 아이들. 놀라운 것은 미디어 중독인 아이도 등장한다. 도대체 몇 십 년을 내다보신 건가요? 달 아저씨?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다시 봤다. 진짜보다 더 진상 같아서 사랑스러운 초콜릿 공장의 아이들. 수십 년간,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이들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매력을 확인하고 다시 보니 그제야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달큼한 초콜릿 냄새가 내 코를 간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