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비누 Dec 07. 2016

바뀌지 않는 세상과 항상 변화하는 시대의 공존

음악극 <올드 위키드 송>과  영화 <다가오는 것들>

운 좋게 음악극 <올드 위키드 송>의 R석을 반값에 얻어 좋은 자리에서 보고 왔다. 지난 과거로부터 삶에 대한 신념을 음악으로서 확립한 선생과 과거의 고통으로 시작된 자신의 내면을 음악적으로 찾아가는 제자 간의 이야기였다. 음악을 많이 사용해서 다룬 연극이었지만 내게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더 다가왔다. 

올드 위키드 송

극은 여러 방면으로 선생이 정립한 철학적 요소와 제자가 겪는 성장통의 요소가 분명하게 나뉘어 대비되었다. 첫 번째로 선생과 제자가 가지는 삶에 대한 성향이 대비된다. 선생은 처음부터 정적이고 함구한다. 반대로 제자는 동적이며 솔직하다. 항상 선생은 제자를 기다리고 제자는 선생을 찾아간다. 이는 선생의 전유물인 멈춰진 시계로서 확립되고 제자의 전유물인 바꿔 쓰는 모자로도 인지된다. 선생은 2차 세계 대전부터 멈춰진 시계를 원래 그랬다는 식으로 고치려 하지 않고, 제자는 쓰게 되면 ‘척’할 수 있는 여러 모자를 통해 자신을 찾으려 한다. 이런 요소들이 선생과 제자의 성향을 대비적으로 나타낸다. 


두 번째로 음악적 대립이다. 초반 레슨을 보면 선생은 음악에 정답이 없고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주장을 한다. 반대로 제자는 템포와 감정들을 틀에 넣어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이런 음악적 대립은 오히려 서로에게 오해를 낳는데, 선생은 제자와 마음으로 통할 수 있는 옛 사건들을 숨기고 기술적인 것으로 접근하려 하고 제자는 자신이 좋은 테크니션을 가졌으니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함축적인 뜻을 내세운다. 나와 다른 신념의 한 사람을 내가 가지고 있는 개념으로 이끌기가 얼마나 힘든지 새삼 느끼는 부분이었다. 최근 본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이자 교수인 나탈리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에 대한 수업 내용을 준비하는 것과 오버랩되어 더욱 감정이 이입되었다. 


세 번째로 시대적 대립이다. 슈만과 필립 글라스, 고전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유럽과 미국이 팽배하게 대립한다. 선생은 단순하고 심플한 현대 음악을 내리 깎고, 제자는 요즘 예술은 군더더기를 버리고 깔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고 나면 서로 농담하지 말라며 손사래 치고 비웃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쳐왔던 곡들을(인상주의부터 바로크까지.) 시대별 역순으로 (리스트-베토벤-바흐.) 훌륭한 대가들(호로비츠, 글렌 굴드 등)의 흉내를 내며 연주한다. 선생 또한 극의 마지막쯤 어쩌면 반듯한 현대 건축물이 오히려 정확할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이 대비되는 요소들을 앞세워 선생과 제자는 유태인이라는 공통점을 서로 속여가며 자신의 주장을 억지로 주입하려 한다. 이렇듯 선생과 제자의 상황적 대립은 장치적으로, 의미적으로 확실히 대비되었다. 


보는 내내 이런 대립적인 효과로 구분을 확실히 했다면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였다. 선생은 자신의 시대를 만나고 가는 바람이고 제자는 자신의 시대를 만나러 가는 바람이다. 선생은 이미 제자가 지금 겪는 혼돈을 겪어왔다. 세상은 독일어를 쓰고 싶지 않아도 써야만 하고 음악적 표현에 중요한 의미를 담아야 하는데 점점 더 축소되고 가벼워지고 있다. 반면 제자는 자신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준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의무감이 있다. 그 일 때문에 제자는 자신이 더 큰 음악가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정확히 알고자 한다.


여러모로 최근 본 영화인 ‘다가오는 것들’과 비교되었다. 처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올드 위키드 송을 보았고 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다가오는 것들을 보았다. 두 번째 볼 때 더 재밌는 영화들을 좋아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영화 중에서 책 '팡세'를 다루기도 하고 루소나 알랭의 '행복론'을 거론하기도 한다. '행복하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이라는 유명한 구절은 주인공이 외로움에 사무쳐 침대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대변하기도 한다. '나도 예전에는 급진적이었고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행동을 해왔지만 세상은 똑같더라’라는 말로 정리를 해버린 자신의 모습은 최근 본 영화와 올드 위키드 송에 나타난 두 선생의 모습이었다. 영화와 연극 모두 선생이 제자에게 거는 기대와 희망은 삶의 원동력과도 같이 나타난다. 이것이 그들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빛이었다. 연극 초반, 선생은 방에 불쑥 찾아온 제자와 처음 만날 때, 다른 사람인 줄 알고 자신의 연주를 방해했다는 것만으로 그를 증오하듯 나무란다. 하지만 곧 찾아오기로 한 제자임을 알아차리고는 자세를 고쳐 잡고 정중하게 사과한다. 선생에게 제자라는 빛은 그렇게 찾아온 것이다. 

다가오는 것들

물론 이 연극은 음악적인 요소가 다분한 공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내가 정리한 해석을 내포하고 있지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오히려 이 연극이 좋은 철학과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서 주인공이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진리는 논제가 가능한가, 논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분야의 진리로 다뤄야 하는가. 예전에는 진리로 여겨졌던 부분들이 지금 시대에 그렇지 않은 것으로 다뤄지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은 현시대에 다시 거론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독일의 유태인 학살과 같이 절대적으로 명백한 진리는 존재한다. 그 진리들은 어느 분야에 갖다 대도 일치할 것이다. 세상은 바뀌지 않지만 시대는 항상 변해왔다. 그 변하는 시대에 맞춰 변화하는 것은 마땅하나 자신이 이뤄놓은 관념이나 원형을 무너뜨리면 안 된다. 그것은 자기부정이 될 우려가 있고 소화하지 못한 생경한 이념들로 본인의 인생관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