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와 혼자 사이의 여행

친구들 넷과의 여행, 그리고 3월의 나

by youngvocati

네 명이서 걷는 길 위에서


이 글이 올라갈 때쯤이면

나는 아마 친구 셋과 함께 어딘가를 걷고 있을 것이다.


편의점 앞 의자에 넷이 앉아

아무 말 없이 컵라면을 먹고 있을 수도 있고,

지도 앱을 보면서

“여기서 더 걸어갈까, 아니면 택시 탈까”

사소한 회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요일 밤,

가방을 싸며 여행을 상상하던 나는

주로 ‘나 혼자’를 떠올렸다.


혼자 기차에 앉아 있는 모습,

혼자 카페 창가를 바라보는 모습,

혼자 자전거를 타고 길 위에 서 있는 모습.


그런데 정작 지금 내가 떠난 첫 여행은

혼자가 아니라 넷이서 같이 움직이는 여행이다.


같은 길을 걷지만

‘여행’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하루를 조금 더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고,

언제 힘들다고 말하는지,

어떤 장면에서 제일 크게 웃는지.


같이 떠나는 여행은

결국 풍경만이 아니라

함께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된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앞장서서 걷던 사람, 분위기를 만들어 보고 싶은 사람


지금까지의 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앞장서서 이끄는 사람에 가까웠다.


모임에서 약속을 잡을 때도,

조별 과제를 할 때도,

“그럼 내가 한 번 해볼까”라는 말을

먼저 꺼내는 편이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할 때도

자연스럽게 일정과 교통, 숙소를

먼저 찾아보게 되었다.


길이 애매할 때

앞에 서 있는 일,

사람들이 헷갈려할 때

대충이라도 방향을 잡아 보는 일.


그런 역할을 하는 데에는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내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그 자리가 비어 버릴 것 같다는

이상한 의무감도 생겼다.


이번 여행에서

조금 다른 시도를 해 보고 싶어진 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단지

‘앞장서는 사람’으로만 남고 싶지 않다.

조금 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드는 역할을

해 보고 싶다.


딱히 웃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실수도

너무 심각한 사건이 되지 않도록

먼저 웃어넘겨 보는 사람,


계획이 어긋났을 때

“이것도 나중에 이야깃거리 되겠네”라고

가볍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


철학자들은 가끔

‘진짜 나’가 무엇인지를 묻지만,


여행을 앞둔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해 보고 싶다.


“이번 여행에서의 나는

어떤 표정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늘 앞에서 길을 찾던 사람으로만 남을지,


아니면 함께 있는 시간이

조금 덜 무거워지도록

분위기를 덜어주는 사람으로도

기억될 수 있을지.


역할은 능력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내가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태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과 떠나는 여행과 혼자 떠나는 여행


사람들과 같이 떠나는 여행에서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보다

함께 있는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가 먼저 보인다.


나 하나의 기분보다

“우리 넷의 기분”을

조금 더 크게 고려하게 된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곳보다

다른 사람이 더 좋아할 것 같은 곳을 택하고,

내가 조금 피곤해도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웃음을 계속 유지해 보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오늘은 우리 넷이 이런 하루를 함께 살았다”는 문장이

지도 위에 조용히 찍힌다.


반대로,

3월에 떠날 자전거 여행을 떠올리면

풍경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시간에 나와만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길을 잘못 들어도,

속도가 생각보다 느려져도,

비가 내려도,

힘들어서 멈춰 서도,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아는 사람도,

그 결정에 책임지는 사람도

나 혼자뿐이다.


함께 가는 여행이

관계 속에서의 나를 보여주는 시간이라면,


혼자 떠나는 여행은

관계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래도 남아 있는 나를

보게 하는 시간일 것이다.


같이 있을 때 더 또렷해지는 나도 있고,

혼자 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나도 있다.


둘 중 하나가 ‘진짜’이고

다른 하나가 ‘가짜’인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같은 사람이라도

누구와, 어떻게 길을 걷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될 뿐이다.



두 가지 여행이 함께 만드는 나의 지도


10대를 돌아보면

어디엔가 분명 함께 있었는데도

그 시간 속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장면들이 많다.


사진 속에는 항상 누군가 옆에 서 있고,

시간표와 일정은 빽빽했지만,

“그때 나는 어떤 역할을 했지?”라고 물어보면

대답이 막막해지는 순간들.


그래서인지

20대에는 조금 더 의식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번 친구들과의 여행에서는

앞장서서 길을 찾는 사람일 뿐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이

조금 덜 무겁고

조금 더 편안하게 느껴지도록

분위기를 돌보는 사람이 되어 보고 싶다.


3월의 자전거 여행에서는

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조차

나 스스로에게

조금은 다정한 말을 건넬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여행은 단지 장소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나를 설명하는 문장’을 바꾸어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늘 앞장서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에

“그리고 가끔은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라는

한 줄을 덧붙여 보는 것.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라는 문장 옆에

“하지만 어떤 사람들과는 오래 같이 있고 싶다”라는

문장을 적어 보는 것.


사람들과 떠나는 여행과

혼자 떠나는 여행이

서로 다른 방향의 화살표가 아니라,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보여 주는

두 개의 좌표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자전거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이 글을 다시 읽게 된다면,


그때의 나는

오늘의 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함께 길을 나눈 시간도,

혼자 길을 버틴 시간도,


둘 다 지금의 너를

조금씩 더 또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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