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꿈
이미와 아직 사이
가끔 모든 게 꿈만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내 일상을 흠뻑 물들인 고요한 평화를 깨달을 때다. 나는 언제나 한 발 느리다. 내가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땐 꿈은 이미 와 있다. 얼굴을 가볍게 스치는 바람, 지저귀는 새소리, 저만치 석양이 물들고, 옆에선 가족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감히 천국을 떠올리게 하는 이 완벽한 순간들.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축복의 순간들. 이런 순간마다 나는 감사와 함께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마음으로 충만해진다.
내게 꿈은 이루기 위해 쫓는 것이었다. 언제나 가 닿을 수 없는 바람과도 같았다. 그 바람을 잡기 위해 나는 내 인생의 거의 절반을 써버렸다. 나머지 절반을 시작한 지금, 꿈은 이루는 것도 쫓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짜 꿈은 내 일상에 이미 와 있다고 믿게 된다. 아직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이미 와 있는 것. 꿈은 쫓는 게 아니라 깨닫는 것이었다. 꿈은 이루는 게 아니라 이미 도래한 것을 인지하는 것이었다. 미래가 아닌 현재였다. 가 닿을 수 없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꿈이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믿었던 건 내가 더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노력이 부족하거나 열정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장님이자 귀머거리였다. 아니, 치열하게 잠든 사람이었다. 바람을 느끼고 새소리를 듣고 붉은 석양을 보면서도 나는 느끼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꿈은 그것들과 함께, 그것들 안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미련한 나는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순간에 눈이 떠지고 귀가 열리게 되면서 그것을 깨달았다. 구원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미 소중한 많은 것들을 놓치고 난 이후였다. 잃어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 나는 꿈을 쫓지 않는다. 다만 그 꿈을 알아채려고 애쓴다. 자연스레 내 눈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내일이 아닌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소박한 오늘을 향하게 된다. 내 귀도 저 멀고 높은 곳에서 들릴 듯 말 듯한 소리가 아닌 내 주위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들에 집중하게 된다. 예전에는 땔감일 뿐이었고 잡음일 뿐이었던 지금, 여기가 내가 살아 있는 유일한 시공간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 순간이 언제나 찾아오지는 않는다. 내 노력과 의지만으로 열 수 있는 시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은 철저히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다. 나는 그저 성실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언제 올 지 모르는 그 순간을 기다릴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늘 깨어 있는 것, 예비된 신부처럼 그 순간이 왔을 때 놓치지 않고 곧장 알아챌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쉽지 않다. 나는 금세 예전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티끌만큼 사소한 일에도 흥분하고 분노하여 어리석게도 나는 현재를 탕진하다가 또다시 잠들어버린다. 어두운 세계로 다시 추락해 버린다. 깨어 있는 건 쉽지 않다. 알아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다가 가끔, 아주 가끔, 예기치 못한 순간에 구원의 빛 한 줄기가 내게 임하면, 나는 또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그 시공간 속으로 입장하게 된다. 마치 가장 늦게 포도밭 일꾼으로 초청받은 사람처럼.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오래전 꿈을 쫓다가 뒤늦게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고 이미 와 있는 실상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나는 언제나 막차를 타고 맨 뒷좌석에 앉은 채 천국에 입성한다.
꿈은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그 무엇과도 같다. 이미 왔기 때문에 잡을 수 있고 누릴 수 있으며,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늘 기다려야 한다. 당분간 이런 나날들은 계속될 것이다.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 말이다.
단, 준비하는 동안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옆에서 자고 있는 이들을 깨우는 일이다. 그들에게 꿈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일 뿐이기에 나는 그것이 이미 와 있다는 진리를 전해야 한다. 진리를 먼저 알게 된 자의 숙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 자신을 깨어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나는 믿게 된다. 내면에 잠들어 있는 자아를 정직하게 볼 수 있도록 돕고 스스로 깨어나도록 돕는 일은 곧 나도 모르게 다시 잠든 나를 직시하고 다시 깨우는 일과 같다는 사실을 늦었지만 조금씩 체험해나가고 있다. 와 있는 꿈을 겨우 몇 번, 그것도 뒤늦게, 맛본 자의 고백이자 숙명이자 사명이자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