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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웅 Oct 10. 2020

부재의 기억: 조금 더 온전한 역사를 기록하다.

하희정 저,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을 읽고

부재의 기억: 조금 더 온전한 역사를 기록하다.


하희정 저,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을 읽고.


흔히 하는 말처럼 역사는 승자, 강자, 혹은 살아남은 (혹은 죽인) 자들의 과거 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기록에는 늘 배제되거나 잊힌 나머지 절반 (어쩌면 다수), 즉 패자, 약자, 혹은 죽은 (죽임 당한) 자들의 이야기 (혹은 진실)가 누락된 셈이다. ‘온전한 역사’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부재의 기억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온전한 역사’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는 기독교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저자가 간파한 것처럼, 2000년 역사를 통틀어 기독교 역시 ‘권좌를 위한 종교’, ‘종교 위의 종교’로 군림했던 시기가 더 길기 때문이다. ‘우는 자를 위한 종교’로 출발했지만, 기독교 내부에서는 약육강식이나 승자독식과 같은 힘의 논리가 여전히 유효했다. 예수의 사상과 정반대 되는 논리였다.


가부장적 위계질서는 이를 초월한 예수가 그 시작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유대인들의 문화는 남성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알다시피 여성과 아이들은 사람 수를 셀 때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질서는 예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질서였으며, 불행하게도 시대를 초월하며 고질적인 문제로 남았다. 


이 책은 기록에서 배제되거나 기억에서 지워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되살려 기독교 역사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저자의 표현대로 ‘역사 속 여성은 남성의 반대말이 아니라 배제된 자의 대명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책의 제목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의 의미는 생물학적 여성을 넘어 잊힌 모든 약자와 소수자에게까지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 순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사라진 대표적 여성들을 소환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역사관을 뒤흔드는 작업을 착실히 진행한다. 특히, 고대 편을 다루는 PART 1은 도입부부터 마치 탐정소설을 읽는 듯한 스릴까지 느낄 수 있으며,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한 실화로 교회가 일찍이 봉인해버린 내용 중 일부를 파헤쳐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내게도 그랬던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 실수 때문에 창녀라는 누명까지 뒤집어썼던 막달라 마리아. 그녀는 여러 나그함마디 문서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50년 이전에 먼저 발견되었던 ‘마리아 복음서’에서도 버젓이 제자로, 사도로 기록되어 있었다.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그리고 가장 뛰어났던 제자는 우리가 흔히 아는 베드로와 요한이 아니라 마리아였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성서 밖의 성서’들은 불행하게도 정경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외경으로 취급받아온 덕에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혹은 불경하게 여기거나 이단시하는 경향도 강하지만), 적어도 현대교회가 그리도 돌아가고 싶어 하는 초대교회 시절 그리스도인들에겐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지위를 가지고 읽혔다. 정경과 외경을 구분하고, 정통과 이단을 구별한 역사의 배후엔 성령의 역사가 아닌 정치 사회적인 힘의 논리가 은밀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론은 절대 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 찬가’에서 비치듯,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는 권력의 폭력성을 당당히 고발하며 종교의 본질적 가치를 성실히 살아낸 강직하고 신실했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마리아의 이미지는 육체적 순결함을 끝까지 지킨 정숙한 여인, 혹은 교회의 권위에 순종으로 응답한 믿음의 여인으로 탈바꿈되었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찬미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이 교묘한 술수는, 저자가 간파한 대로, 힘 있는 자들 (주로 남성)이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도 여성들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에의 의지는 사악하고 간교한 프레임을 이용한 기만의 대가리를 먼저 움켜잡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당하는 쪽은 약자들이다. 


두 마리아 이야기를 뒤로 하고 저자는 다른 ‘성서 밖의 성서’에 기록된 몇몇 여성들을 더 소환하며 우리가 알고 있던 불완전한 기독교 역사의 퍼즐 조각을 몇 개 더 맞춰나간다. 생소한 이름들을 접하며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다가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 장에서 독자들은 나처럼 조용한 분노와 함께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박해에 맞서 싸운 여성 순교자들의 신앙적 열정과 용기를 후대에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여전히 그들의 역할을 ‘여성성’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고 단순히 그들의 신앙을 교회의 모범으로 세우고 교육하고자 했던 교회 남성 지도자들의 비뚤어진 의도를 목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암흑시대라고 알려진 중세는 그야말로 기독교 제국시대였다.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종 이전에 가졌던 가부장적 가치관은 성서에 의해 정당화되기 시작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기독교의 겉으로 보이는 위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했다. 여자를 죄의 본성으로 보았던 터툴리안,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했던 암브로스,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된 건 맞지만 그 도움은 출산일뿐이라고 못 박았던 어거스틴. 이들 모두는 여성이 남성 아래 있다는 주장의 근거를 창세기 2-3장, 그리고 베드로 서신과 바울 서신에서 찾았다.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신에게로 가는 길에 초대된 존재라며 안드로포스 (온전한 사람)를 이루는데 힘쓸 것을 권면했던 예수, 그 안드로포스가 되는 구원의 여정은 모든 인간에게 열려있다고 가르쳤던 예수, 그 예수의 혁명적 정신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이었을까. 세속적 욕망과 공허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신앙의 본질을 지켜내고자 했던 여성들을 이단으로 고발하고 마녀로 낙인찍고 살해까지 감행한 교회의 남성 지도자들에게 과연 예수는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정경 선정자들이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을 중요한 제자요 사도로 기록한 성서들을 왜 외경으로 분류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성이 강조되고 시민 사회가 들어서기 시작한 근대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여성들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시대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인간의 한계였을까. 종교개혁을 주도했고 ‘만인 사제설’의 ‘만인’에 여성을 포함시키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루터는 물론, 장로교의 시작인 칼빈마저도 남녀평등사상은 인정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은 씁쓸함을 던져주는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역사에는 의외로 짙은 그림자가 많이 드리워져있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준다. 또한, 그러한 시대와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수에 의해 이름도 빛도 없이 진행되었던 여성 운동의 존재는 칠흑같이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빛나는 등잔불이었다. 어쩌면 성령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기독교 역사에 더 많이 담겨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마지막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전해진 기독교의 정착사를 짧게 다룬다. 서구 기독교의 해외 선교는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문화의 근본을 바꾸어놓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엔 어두운 면도 존재했다. 식민주의 페미니즘이라고 알려진 개념 속엔 계몽이라는 명목 하에 감춰진 서구 우월주의에 대한 각인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잘 드러나있듯, 동양에 대한 서구인들의 정복주의적 상상력은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만들어 낸 악마의 프레임이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또다시 묻는다. 안드로포스를 향한 여정에 있어서의 평등한 인권을 외친 예수의 정신은 과연 어디에 있느냐고. 피라미드 시스템 안에 과연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존재할 수 있겠냐고.


학교과 병원 시스템 구축을 통해 효과적으로 들어온 기독교의 전파가 세계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내몰았던 영국과 미국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이 아이러니한 사실은 과연 동아시아 해외 선교의 동력이 예수의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서구 열강들의 땅따먹기의 일환이었는지 되짚어보게 만든다. 저자가 표현한 대로, 과연 그 당시 기독교를 처음 접한 아시아인들에게 복음은 정말 기쁜 소식이었을까. 제국주의에 묻어 간 기독교 선교 역사의 어두운 면을 우리는 더 이상 덮으려 하지 말고, 액면 그대로 바라보며 반성과 더불어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저자가 ‘닫는 말’에서 밝히듯, 이 책은 ‘무엇이 이단이냐’보다 ‘누가 이단을 말하느냐’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기독교 전 역사에서 여성 (이때 여성은 약자와 소수자를 포함하는 의미일 것이다)의 역사와 이단논쟁의 역사는 분리가 불가능할 만큼 그 역사적 궤를 같이 한다고 한다. 너무나 공감 가는 말이기에 나는 이에 할 말을 잃는다. 역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 역사의 불완전성, 그 불완전성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기만, 그리고 그 기만 배후에 있는 인간의 교만을 생각해본다. 저자가 왜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안치민의 말을 택했는지 알 것만 같다. 그렇다. 이 세상엔 유일한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성은 풍성한 조화로움의 뼈대다. 획일성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며, 이는 곧 살인자의 속성일 뿐이다. 살아갈 동안 얼마나 더 온전한 역사를 대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기대한다. 이런 책이 계속해서 나와 약자와 소수자의 억울함이 해소되고, 그와 더불어 비뚤어진 우리들의 역사관이 점점 바르게 잡혀가길.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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