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웅 Oct 08. 2020

그로테스크한 궤변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를 읽고

그로테스크한 궤변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를 읽고


평소 같았으면 방금 읽은 책의 잔상에 의지하여 노트북 앞에 앉아 감상을 써내려 갔을 것이다. 그러나 어젠 그러지 못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어젯밤,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는 내게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잔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랬는지 밤엔 불쾌한 꿈을 꿨다.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오늘을 맞이했다). 어떤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아니었고, 교훈을 얻을만한 잠언집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설국"이 남겨준 것처럼 그림 같은 이미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복잡하지도 않다. 등장인물은 박경리의 “토지”에 비하면 그 수가 십 분의 일도 안되었고, 책에서 설정한 시공간의 단순함, 결코 많지 않은 대화, 그리고 불과 200페이지 정도의 분량 때문인지 플롯 자체도 단순했다. 그러나 기승전결이 분명하지 않았을뿐더러, 인물들 사이의 갈등 구조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은 다른 책을 읽었을 때와 달리 복잡하기만 했다. 왜 그랬을까?


이 책은, 읽는 내내 느껴지는 묘한 긴장이 있다. 이는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을 읽을 때와는 다르다. 사건 전후를 관찰하여 단서를 찾아내고 또 그다음을 예측해 나가며 과연 내가 맞을까 틀릴까 하는 기대와 조바심이 전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한 예측 자체를 거부했거나, 예측을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거나, 아니면 적어도 나에겐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무섭다는 표현도, 기괴하다는 표현도 이 책의 느낌을 표현하기엔 적당하지 않다. 책 소개에 사용된 단어가 그나마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로테스크. 그렇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던져주는 책이다.


총 14장으로 쪼개져 있는 전체 스토리는 장과 장 사이의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스토리도 잘 연결이 되는 편이다. 그러나 그 어떤 장도 내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주지는 않았다. 매 장마다 남는 알듯 말듯한 그 찜찜함은 뭔가 나중에 큰 사건이 일어날 복선 같기도 하고, 큰 사건이 터지기 직전과 같은 폭풍 전 고요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지속되다가 책은 마지막에 주인공을 죽이고서야 끝이 난다.


기독교 예수의 의미를 상식적으로나마 모르는 사람은 아마 이 책을 이해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예수를 깊이 알고 있는 사람조차 이 책을 이해하기에 힘들어 하긴 마찬가지일 것 같다. 뭔가 숨겨져 있는 의미를 완전히 찾아내려고 맘먹는다면 말이다. 이 책에는 기독교에서 정의하는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개념이 바닥에 깔려 있다. 그 개념을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독자들에게 기괴한 느낌의 답 없는 수수께끼를 툭 던져놓는다. 예수는 구원자, 그리스도, 자기 몸을 희생하여 모든 인류의 죄를 없앤 존재 정도로 그려져 있다. 심각한 기독교의 교리나 사상을 적어도 나는 이 책에서는 감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지속적으로 맡은 것은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진하게 가미된 광신적인 냄새였다. 그것은 무지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았고, 영과 진리의 밸런스가 깨어진 채로 감각적이고 주관적인 종교로 그려져 있었다. 사기도, 절도도, 폭력도, 살인도, 그리고 자학도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사람들의 의식 너머에 존재하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차원까지 깊숙이 새겨진 그 어떤 힘이었다.


주인공인 헤이즐 모츠는 진리가 없다는 게 진리라며, 그리스도 없는 교회를 전한다며, 죄와 구원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며, 정통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상에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그것이 자신을 이끌고 가는 힘이 될 정도로 그에게선 중심사상이 되어가지만, 자신이 어릴 적에 각인된, 순회 설교자였던 할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에서 그는 끝내 벗어나지는 못했다. 전하는 내용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으나, 결국 할아버지가 했던 방식, 차 옆에 서거나 위에 올라 순회 설교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그나마 그리스도인 예수를 전했지만, 그는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를 전하기 시작했고, 신성모독이야말로 진리로 가는 진정한 길이라고까지 설파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맹인이 보지 못하고 절름발이가 걷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죽은 채 있는 교회의 성도이자 목사입니다.” 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 궤변인가.


그는 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사기꾼 설교자가 그의 외모를 모방하여 예수가 아닌 새로운 선지자로 사람들 앞에 세운 폐결핵 환자를 계획적으로 뒤쫓아 죽이고야 만다. 이 장면에서 더욱 간담이 서늘하게 느껴졌던 까닭은 그에게서 일회의 망설임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차에 깔려 죽어가는 그 폐결핵 환자에게 이렇게까지 말했다. "내가 못 참는 것 두 가지가 있어. 진짜가 아닌 사람과 진짜를 흉내 내는 사람. 방금 당신이 당한 것을 피하고 싶었다면 나를 절대로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그리고 그는 차 범퍼에 묻은 핏방울을 태연하게 헝겊으로 닦은 뒤 마을로 돌아가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완전 사이코 드라마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그러나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차가 폐차 직전까지 고장이 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고속도로에서 만난 또 다른 느낌으로 폭력적인 순찰 경찰관에 의해서 그의 차는 마침내 파괴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차가 없는 헤이즐 모츠는 걸어서 마을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생석회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눈을 멀게 할 작정으로 사 온 것이었다.


결국 생석회를 눈에 발라 자기 눈을 못 쓰게 만들고 맹인이 된 헤이즐은 고행의 길을 스스로 마다하지 않고 걸어가게 된다. 이 갑작스러운 행동의 변화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가했던 것일까, 아니면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던 자동차가 어이없는 경찰관의 폭력으로 인해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여관집 여주인의 질문에 그는 그저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신발 안에 작은 돌을 일부러 넣어두어 보이지도 않는 길을 걸어갈 때조차 발에서 고통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했으며, 가슴에는 철사를 휘감아서 그 뾰족한 부분 때문에 피가 나게까지 했다. 그는 살인을 하기 전에는 예수가 아닌 새로운 선지자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고 설교했으나 결국 그 자신이 스스로 피를 흘리는 고행을 함으로써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은 대가를 치른다고 하는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정말 그로테스크한 느낌이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가 읽으면서 느끼고 상상했던 것만 원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안에 숨겨진 무언가 깊은 뜻을 파악하길 바랬던 것일까. 과연 헤이즐 모츠는 구원을 받았을까. 그가 활동했던 그 마을의 광기 어린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헤이즐은 그저 광기 어린 사이코 집단의 일부, 그러니까 대표성을 띠는 한 사람이진 않을까. 그리고 그가 설파했던 그리스도 없는 교회라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그 시대적 상황을 대변하는 신비주의적이고 광신적인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이어진다.


이해할 수 없고 말이 별로 없는 어둡고 칙칙한 흑백으로 만들어진 유럽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종교적인 색채가 가해진 새롭고도 낡은 스타일의 그로테스크를 느껴보고 싶다면 난 자신 있게 이 책을 권한다. 그러나 어떤 교훈을 얻고 싶거나 정해진 범위 안의 답에 만족하고 그것 때문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물론 내가 피카소의 그림을 피카소의 그림으로 느끼고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수준이 저렴해서 이런 감상을 끄적거리는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별로 권하고 싶진 않다. 나처럼 불쾌한 꿈을 꾸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내일부턴 좀 개운하고 밝은 책을 읽어야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매거진의 이전글 침묵의 역설: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