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작가
작가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성실하게’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글을 잘 쓰는 사람 중에 작가가 아닌 사람도 있고, 작가이면서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글을 성실하게 쓰다 보면 쓰지 않는 사람보다는 당연히 잘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가는 글을 잘 쓴다는 표현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글을 잘 써야 작가라고 불릴 수 있다는 말은 능력 위주 사회의 편향된 가치관의 반영이자 작가에 대한 환상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내 맘대로의 정의이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한번 작가는 영원한 작가라는 말은 오류다. 방점은 ‘성실’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라는 타이틀이 의사나 변호사 같은 자격증에 의해서 공인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과거에 작가였다 하더라도 글 쓰기를 그만뒀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작가라고 불릴 수 없다고 난 생각한다. 물론 다시 쓰기 시작하면 다시 작가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내가 정의하는 작가라는 타이틀은 쓰는 행위에 방점을 둔다. 그 사람의 역량이나 인격 같은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저서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과거의 일이고 현재 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저자일지언정 작가라고 불릴 수 없다. 물론 여기서 글이라 함은 출간된 책만이 아닌 어떤 형태로든지 문자로 써진 글을 일컫는다.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한다면, 명심해야 할 점 몇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세 가지만 들어보겠다. 참고로, 이 또한 내 의견에 불과하므로 아무런 공신력은 갖진 못한다.
첫째, 작가는 성실하게, 계속해서, 항상 글을 써야 한다. 관찰, 성찰, 통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자연스레 글쓰기와 연결되는 사람이다. 음악가가 어떤 음악으로 표현하고, 미술가가 그림으로 표현하듯이 작가는 글로써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맛보는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둘째, 작가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끊임없이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읽지 않고 쓰기만 하면 언젠가는 저마다 다른 한계에 봉착하고 바닥이 드러나게 된다. 주로 이런 현상은 남들이 알기 전에 스스로가 먼저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환멸을 느끼게 되는 게 수순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그 아름답던 수사도 빛이 바래고 시들고 만다. 그 자리에는 공허가 깃든다. 생명력 하나 없는, 아무런 무게를 지니지 못하는 글 나부랭이, 혹은 감성팔이, 혹은 3류 찌라시 정도가 된다. 이런 글은 글을 전혀 못 쓰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글 좀 쓴다고 여기는 작자들, 자기 글에 취해, 자기 글에 반응하는 그 좁은 우물 안에 갇힌 사람들의 입에 발린 칭찬에 취해 공부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는 작자들로부터 나온다. 그 한없이 가벼운, 소위 좋은말대잔치 혹은 아무말대잔치 등은 글 자체에 대한 모독이다. 역겹다. 나는 그런 글을 읽을 바에는 차라리 간판을 읽겠다.
셋째,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자신의 고유한 필체를 찾았다면, 먼저 축하한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 필체를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유지란 정체가 아니다. 오히려 역동적인 움직임이다. 고인 물이 아닌 흐르는 물이다. 한결같다는 말을 기억하라. 결코 죽음을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 아니다. 글은 먼저 살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읽는 이도 살릴 수 있다. 자신도 치유할 수 없는 글은 남들도 치유할 수 없다. 새로운 필체, 새로운 기법, 새로운 장르 등을 도전하고 연구해야 한다. 도전은 곧 살아있음이다.
적어도 책 하나 내야 작가라고 생각하는 틀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작가라는 타이틀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작가는 누구나 될 수 있다. 단, 어느 분야나 그렇듯 꾸준히, 성실하게 쓰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도전하는 사람만이 작가라고 불리기에 합당할 것이기에 사실상 아무나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낮고 묵묵히 작은 일에 성실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작가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