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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웅 Jun 13. 2023

구약과 그리스도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읽고

구약과 그리스도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읽고


어제 박영호 목사님의 포스팅은 내가 6년 전 크리스토퍼 라이트에 꽂혀 그의 여러 저서를 집중적으로 읽으며 나름 은혜도 받고 눈이 열리고 귀가 트일 때를 떠올리게 했다. 나에겐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고 회복되던 시기였다. 두 번째 회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시기였다. 성서유니온에서 나온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라는 책도 평신도인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는데, 이를 통해 박영호 목사님께서도 지적하신 바, ’그리스도를 향한 것‘과 ’그리스도에 관한 것‘의 차이를 명료하게 알게 되었다. 목회자들은 이 책을 읽고 구약을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지에 대한 팁을 얻을 수 있겠지만, 평신도들은 이 책을 읽고 어떤 설교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높이는지, 어떤 설교가 그리스도 중심인지 분별할 수 있는 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6년 전 열심히 이 책을 읽으며 발췌해 놓은 두 본문을 여기에 옮겨본다. 4장과 8장에서 발췌했다. 신학교에 발도 들여놓지 못한 내가 이 책을 서평하는 건 주제넘은 짓 같아 감상문은 이 정도로 마친다. 


덧: 그나저나 팀 켈러를 이제 읽기 시작했는데, 복잡한 심정이다. 


1. '성경 전체의 중심과 초점이 그리스도' 라는 말이 과연 '성경 모든 본문이 모두 그리스도에 관한 것' 이라는 뜻일까?


| 그리스도가 없는 본문에 그리스도를 강제로 우겨넣는 것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은 아니다. - 데일 랄프 데이비스 |


내가 아는 한 교회에서는 여러 설교자가 모든 구약성경이 ‘전부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설교를 꽤 잘했으나, 내 귀에 그리고 그 교회 여러 사람들의 귀에도 모든 설교가 늘 똑같이 들렸다. 본문이 어디든 간에, 설교 내용을 예측할 수 있었다. 설교자들은 언제나 설교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복음을 제시하는 것에 매우 집중했으므로 설교는 언제나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요청으로 끝났다. 


이처럼 일부 사람들은 모든 설교가 복음 제시여야 하고 ‘결단의 시간’으로 끝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20:2,7에 비추어 볼 때, 사도 바울 역시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전도 설교가 중요하다고 여기며, 예수님을 전하고 그분을 믿도록 초대해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에는 이렇게 하는 본문이 많으며, 당연히 사복음서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렇지 않은 본문이 더 많다. 우리는 설교할 때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바를 전해야 한다. 재빨리 예수님께로 건너뛰어 회심을 요구함으로써 성경을 근거로 우리의 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이 말하는 바를 설교해야 한다. 오히려 성경의 매우 다양한 가르침을 시간을 두고 성실하게 설교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하고 그분을 구주로 믿으며 주님으로 따른다는 것이 실제로 무슨 뜻인지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매우 다양한 각도와 시각에서 보게 될 것이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에 계시된 놀랍도록 다양한 하나님의 가르침과 연결해서 예수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중 4장 ‘내게 예수님만 주면 안 돼요’ 에서 발췌.


2. 이야기에 숨은 기발한 의미를 찾지 않도록 주의하라.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다윗은 개울에서 돌 다섯 개를 골랐다. 우리가 왜라고 묻는다면 (나는 사실 성가시게 왜 그걸 물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둥근 돌이 거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잘 준비하려고 돌 다섯 개를 골랐다. 내레이터는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말할 뿐, 논평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설교자들이 이 돌들이나 개울이나 다윗의 물매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추측한다. 이것들은 그 무엇도 '상징하지' 않는다. 그냥 그 자체일 뿐이며,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실일 뿐이고, 목동의 표준 장비일 뿐이다. 설교자들이 다섯 개의 돌이 다음과 같은 것을 상징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는가?


- 다윗에 관한 다섯 가지: 용기, 확신, 준비, 믿음, 승리 (그 외에 설교자가 열거하고 싶은 것)

- 모세오경

- 예수님이 이적을 베푸실 때 사용하신 떡 다섯 덩어리

- 교회의 다섯 사역자: 사도, 예언자, 전도자, 목사, 교사

- 그리스도의 다섯 가지 상처


또는 이런 알레고리적 해석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 다윗은 시냇물에서 돌들을 가져왔는데, 시냇물은 성령을 상징하며, 따라서 이 돌들은 '기름부음을 받았다.'

- 다윗은 예수님이다. 골리앗은 마귀다. 돌은 우리다 ('산 돌'). 개울은 성령이다. 물매는 기도다.


이런 설교의 문제는 모든 것을 매우 분명하고 영적으로 들리게 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옳은 영적 핵심들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과 기도로 마귀에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발한 개념들은 내레이터가 자신의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기발한 알레고리적 해석은 심각한 폐해를 일으킨다. 사소한 부분들에 집중해서 그것들을 이야기 자체와 아무 상관없는 상징으로 여김으로써 이야기 전체에 그리고 내레이터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적에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해석은 특정 이야기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디에 위치하느냐 하는 정황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큰 흐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회중은 이렇게 생각할 소지가 있다. '나 혼자서는 성경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어. 성경은 온통 숨은 의미로 가득해. 그게 무엇인지 목사님이 나한테 가르쳐 주셔야 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본문 자체의 권위와 능력은 설교자의 영리한 추측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은 성경 본문을 잊고서 '목사가 그 본문은 이런 뜻이라고 우리에게 말해 준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을 다루는 무책임한 방식이다. 이런 식의 설교를 한다면, 사람들은 성경이란 결코 스스로 이해하지 못할 책이라는 의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느 본문에서든 자신들이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예수님에 관한' 온갖 종류의 의미를 도출해 줄 수 있는 똑똑한 설교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월리를 찾아라'와 같은 게임이 아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마치 '예수님을 찾아라'라는 게임인 양 다루어서는 안 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중 8장 '구약성경 이야기를 설교할 때 피해야 하는 일곱 가지 위험'에서 발췌.


#성서유니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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