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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웅 Dec 16. 2023

가볍고 주제도 빈약한 두서없는 이야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 살의 노파’를 읽고

가볍고 주제도 빈약한 두서없는 이야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 살의 노파’를 읽고


이 단편 역시 1876년 '작가 일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 실망스러울 정도로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조차 모호할뿐더러, 단편소설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임팩트도 없고, 도스토옙스키스러운 면도 보이지 않으며, 작품 속 화자 (도스토옙스키 자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스스로도 마지막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시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벼운 데다가 주제도 빈약한 이야기이다. 사실, 한 달 동안 들은 사건들 가운데서 무언가 놀랄 만한 것을 이야기하려고 계획해 보지만, 막상 일에 착수하면 쓰기가 불가능하거나 혹은 적절하지 않은 내용이 되게 마련이다. 게다가 '네가 아는 것을 모두 말하지 말라'는 격언도 문제다. 그래서 결국에는 두서없는 이야기만 남게 되고 마는 것이다……."


작품은 한 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와 그 이후를 화자가 상상한 이야기로 구성된다. 앞의 이야기는 부인과 노파의 동선이 자꾸 겹치는 우연이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화자의 상상은 내겐 그저 백네 살 (그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굉장히 장수한 경우)의 노파가 손주들을 보러 왔다가 평화로이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두 이야기 사이의 매듭은 긴밀하지 않았고, 부인과 노파의 동선이 겹치는 우연은 우연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았으며, 그 부인이 노파에게 준 5 코페이카 역시 별다른 의미 없이 노파가 마지막 순간 한 손에 쥐고 있었을 뿐이다. 이야기 자체도 아무런 매력이 없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부분도, 행여나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법한 부분도 없는 듯했다. 작품을 마무리하며 화자는 늙은 노파의 죽음은 다른 죽음과는 달리 뭔가 무게가 다르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 그런지 진부하게 느껴졌으며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마감에 쫓겨 즉흥적으로 써버린 짧은 토막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작품의 마지막 단락도 도스토옙스키 스스로가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이상하게도 이 작품을 읽고 도스토옙스키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 대문호도 이런 습작 같은 글을 썼구나 싶어서 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그의 전 작품을 읽어나가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일 것이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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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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