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 살의 노파’를 읽고
가볍고 주제도 빈약한 두서없는 이야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 살의 노파’를 읽고
이 단편 역시 1876년 '작가 일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 실망스러울 정도로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조차 모호할뿐더러, 단편소설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임팩트도 없고, 도스토옙스키스러운 면도 보이지 않으며, 작품 속 화자 (도스토옙스키 자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스스로도 마지막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시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벼운 데다가 주제도 빈약한 이야기이다. 사실, 한 달 동안 들은 사건들 가운데서 무언가 놀랄 만한 것을 이야기하려고 계획해 보지만, 막상 일에 착수하면 쓰기가 불가능하거나 혹은 적절하지 않은 내용이 되게 마련이다. 게다가 '네가 아는 것을 모두 말하지 말라'는 격언도 문제다. 그래서 결국에는 두서없는 이야기만 남게 되고 마는 것이다……."
작품은 한 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와 그 이후를 화자가 상상한 이야기로 구성된다. 앞의 이야기는 부인과 노파의 동선이 자꾸 겹치는 우연이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화자의 상상은 내겐 그저 백네 살 (그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굉장히 장수한 경우)의 노파가 손주들을 보러 왔다가 평화로이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두 이야기 사이의 매듭은 긴밀하지 않았고, 부인과 노파의 동선이 겹치는 우연은 우연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았으며, 그 부인이 노파에게 준 5 코페이카 역시 별다른 의미 없이 노파가 마지막 순간 한 손에 쥐고 있었을 뿐이다. 이야기 자체도 아무런 매력이 없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부분도, 행여나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법한 부분도 없는 듯했다. 작품을 마무리하며 화자는 늙은 노파의 죽음은 다른 죽음과는 달리 뭔가 무게가 다르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 그런지 진부하게 느껴졌으며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마감에 쫓겨 즉흥적으로 써버린 짧은 토막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작품의 마지막 단락도 도스토옙스키 스스로가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이상하게도 이 작품을 읽고 도스토옙스키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 대문호도 이런 습작 같은 글을 썼구나 싶어서 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그의 전 작품을 읽어나가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일 것이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