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우스운 사람의 꿈’를 읽고
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낙원, 그리고 그것의 한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우스운 사람의 꿈’를 읽고
1877년 '작가 일기'에 수록된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우스운 사람이다. 사람들은 요즈음 나를 미친놈이라고 부른다.'
몇 년 전에 읽은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 작품은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최근에 다시 읽은 '분신'의 골랴드낀이나, 독서모임에서 같이 읽은 '약한 마음'의 바샤, 그리고 '뽈준꼬프'의 뽈준꼬프까지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다시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소외되고 단절되고 자기 안에 갇혔다는 점에서 이 모든 인물들은 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광인의 변주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 화자는 스스로를 '우스운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우스운'이라는 의미는 '웃기는'이 아니다. '비웃음을 당하는'에 가깝다. 그는 코미디언이나 개그맨이 아니라 정신이 아픈 자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우스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그는 자신을 비웃는 타인에게 화내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을 다정스럽게 바라볼 정도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병적인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그는 작년에 자살을 결심한 적이 있었다. 자살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자살하기로 결심한 지 두 달째가 되던 11월 3일, 어떤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캄캄했던 밤, 그의 눈에 띈 조그만 별 하나가 어떤 상념을 불러일으켰던 밤, 당장 집에 가서 두 달 전부터 계획했던 자살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던 그날 밤, 그는 하늘을 쳐다보던 중 어떤 여자아이를 만나게 된다. 그 여자아이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듯 절박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화를 내고 집으로 가버린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다시 망설인다. 그러다가 선잠이 든다.
작품의 본론은 그가 잠든 후 꾼 꿈의 내용이다. 꿈속에서 그는 심장에 총을 겨누고 자살을 실행한다.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그는 무덤으로 옮겨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관 속으로 스며든 물방울이 그의 눈 위로 똑똑 떨어졌고, 그는 참지 못한 채 신에게 처음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빈다. 소원이 이루어진 것일까. 돌연 사람의 형상을 한 어떤 존재가 다가와 그를 데리고 날아가기 시작한다. 지구와 비슷한 별에 다다르는데, 그를 데려간 존재는 그 별이 지구가 아니라 여자아이가 도움을 요청할 때 그가 바라보고 있던 별이라고 알려준다.
어느새 그 존재는 사라지고 그 별에 도착한 그는 그 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생활하게 되는데, 이후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그 별 사람들에 대한 주인공의 관찰 보고서가 펼쳐진다. 그가 본 그곳은 마치 죄와 악이 들어오기 전 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자세한 묘사는 여기서 생략하겠지만, 도스토옙스키가 가진 기독교 세계관이 잘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정확한 기작은 언급되지 않지만, 그의 존재 때문에 그곳이 타락하게 된다. 거짓과 위선과 혐오와 차별과 배제 등이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금세 그 낙원을 물들여버린다. 그가 자기 맘대로 스스로의 생명을 빼앗았던 바로 그 지구와 다를 바 없는 곳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을 꼽으라고 하면 작품 속 주인공이 11월 3일 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작은 별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여자아이가 그의 팔을 잡아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을 선택할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 작품 전체를 함축하는 상징적인 장면이라 생각한다. 내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가 고개를 들어 어딘지도 모르는 별 하나를 바라보는 장면의 의미는 천국을 향한 인간의 막연한 바람 같은 것이다. 반면, 그렇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여자아이가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천국은 저 하늘 위 어딘가가 아니라 우리 바로 옆에 존재한다는 것, 곧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장망성 (장차 망할 성)으로 버려지는 공간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장소라는 것이다. 주인공이 꿈에서 깬 이후, 자살 계획을 말끔히 취소하고 가장 먼저 그 여자아이를 찾으러 간 행동은 나의 이 해석을 잘 지지해 준다. 그 여자아이는 그에게 있어 구원의 단초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 순간 덕분에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생을 마감하고 싶을 때,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만나 완전한 무기력함을 느낄 때, 우리의 눈은 텅 빈 눈이 되어 허공을 응시하게 된다. 바로 그때 내 옆에 있는 약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눈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이 시작되는 순간일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상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내가 함부로 내 생명을 앗아가지 말아야 할 이유일 수 있지 않을까.
뿐만 아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의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통해 말했던 하나의 실천적인 사랑과도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그가 이십 대일 때 심취했던 공상적 사회주의가 그리는 유토피아는 진정한 낙원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와도 연결된다. 또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간 스스로의 계획과 노력만으로 진정한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까지도 함축하지 않을까 한다. 구원은 철저히 외부에서 오는 것이며 전적인 은혜이기에 수직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천국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바로 이곳에 임하는 것이기에 수평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유형을 가기 전에 썼던 작품과 그의 나이 오십이 넘어 쓴, 이 작품을 포함한 후기 작품들은 그 끝이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초기작들은 도스토옙스키스러운 인간이 가진 극한의 민낯을 까발리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후기작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구원의 서광이 비치는 듯하다. 그는 실로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바닥까지 파헤친 작가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한 이유는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닌 듯하다. 인간의 한계를 통찰한 뒤 인간에서 신으로 시선을 돌려 구원을 소망하는 글쓰기로 나아갔다는 사실이 그를 대문호라는 타이틀에 부합하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감상문을 마치며 나는 다시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이 된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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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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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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