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저, '성서를 열다'를 읽고
성서를 읽기 위한 정직한 자세
토마스 머튼 저, '성서를 열다'를 읽고
제목이 '성서를 읽다'가 아닌 '성서를 열다'라는 점에 주목한다. 읽기 위해서는 먼저 열어야 하는 법. 그렇다. 이 책은 성서를 본격적으로 읽는 단계가 아닌 그 전단계에 초점을 맞춘다. 성서는 어떤 책인지, 성서를 읽는 나는 누구인지, 성서를 읽을 때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성서를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저자의 탁월한 통찰과 뛰어난 필력은 덤이다.
저자는 우리가 종종 성서를 일방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성서를 현실과 상관없이 영적인 세계의 이야기로만 여긴다든지, 거룩하고 독실한 신자들의 전유물로 여긴다든지,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성, 심지어는 상식에 반하는 책으로 여기는 경우도 왕왕 벌어지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성서가 어떤 책인지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뼈아픈 말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우려한다. '그리스도교가 광신으로, 어리석은 종교성으로 왜곡될 때 우리의 지성은 모욕당합니다'라고.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최근 들어 특히 심해진 것 같은, 창조과학을 내세우며 성경을 문자적으로 (그것도 선택적으로) 읽는 근본주의자들의 반지성적인 주장과 활동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복음과 상황' 2024년 5월호에 실린, 최근 창조과학 비판으로 징계 위기에 처한 서울신대 박영식 교수의 인터뷰 기사 제목, '두려움은 근본주의를 만들지만, 참된 신앙은 두려움을 이긴다'라는 문장도 연이어 생각났다. 쓰인 지 50년이 넘게 지난 토마스 머튼의 통찰과 우려는 지금 이 시대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창조과학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의 존재는 성서 해석의 자세와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실례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성서를 향해 묻기 시작하면 성서 역시 우리를 향해 묻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성서를 읽는 것은 단지 읽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서 읽기는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고 상호적인 대화여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성서에서 물으면, 성서는 우리에게 언제쯤 그렇게 진짜 삶을 살기 시작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성서 읽기는 지식과 경험의 축적, 혹은 소원성취나 문제해결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마치 예수가 성육신하신 것처럼, 마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처럼, 우리의 실제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것인지를 위한 목적을 띠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서를 읽는 우리들은 불편하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성서를 한 번 이상 읽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 목사의 설교에 인용되는 구절을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성서 읽기일 정도다. 성서 안에 모든 답이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조차도 성서를 잘 읽지 않는다는 모순은 성서 읽기가 현실 신자의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님을 반증한다. 성서는 결코 편한 책이 아니다. 친절하지도 쉽지도 않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어본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깊이 우려하는 점이 비수처럼 내 마음에 꽂혔다. 결코 편안한 책이 아닌 성서를 우리는 익숙해지다 못해 편안하게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진지하고 치열하게 읽어보지도 않고, 마치 신앙생활을 오래 한 열매인 듯 우린 경건의 모양만 갖춘 채 성서와 별문제 없이 지내는 법을 터득해 버린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치 성서를 잘 안다고 확신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말한다. 성서를 이해하는 길은 분투의 여정이라고. 그래야 마땅하다고. 성서를 이해하는 길은 성서 안의 극명한 걸림돌과 모순을 정직하게 마주하려 분투하는 길이며, 우린 그 길로 나아가려 애써야 한다고. 우리의 목표는 그러한 모순을 손쉽게 해결해 치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넘어선, 그러면서도 때로 우리와 불가사의하게 얽혀 있는, 기이하고 역설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나는 아멘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계속해서 뼈 때리는 통찰을 진행한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그저 추상적인 명제에 지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성서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며, 성서에 인격적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성서에 대한 참여는 그분과 기꺼이 논쟁하고, 때로 저항하면서도, 우리의 분명한 잘못을 깨닫고 마침내 그 사실을 인정하는 그 전 과정을 포함한다고. 성서는 부정직한 순종보다 정직한 항변을 더 높이 본다고 (아, 명문이지 않은가!).
저자는 우리가 종종 편향되게 성서를 해석한 뒤 그 한 가지 관점을 '신앙'이라 부른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어서 선포한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오히려 신앙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우리의 편향은 우리가 성숙해질 책임에서 도피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을 배제하고, 그것을 몰이해 속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나아가, 우리의 선입견, 우리의 한계로 쪼그라들지 않도록, 정해진 답을 가지고 성서를 열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한, 성서를 대함에 있어 지름길로 가고픈 유혹, 절반의 진실에 안주하고픈 유혹을 이겨야 한다고. 우리의 편견에 안성맞춤인 편안한 해석으로 성서를 협소하게 만들면 결국 우리는 성서를 오해하다 못해 진리를 위조하는 데 이르게 될 거라고 경고하면서 말이다 (두렵지 않은가? 창조과학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여).
두 시간 정도 집중해서 이 책을 읽으며 통쾌함과 동시에 착잡함을 느꼈다. 답을 얻었다는 데에서 통쾌함을 느꼈고, 이런 저자의 가르침을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던 수십 년 전에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착잡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신앙은 성서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때론 무속적이기도 한 것 같은 뉘앙스가 많이 묻어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아마도 한국 교회에서 신앙을 배운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경우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성서를 제대로 알고, 성서를 읽는 우리를 제대로 알고, 성서의 가르침을 하나씩 배우며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길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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