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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웅 May 13. 2024

또, 다시,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

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잠겨 있는 방'을 읽고

또, 다시,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 


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잠겨 있는 방'을 읽고


이 작품도 읽고 나서 여전히 구름을 잡는 느낌이지만, 작품 끄트머리에서 화자가 앞의 두 작품 '유리의 도시'와 '유령들'의 화자임을 직접 밝히고 세 작품의 연결고리를 잠시 설명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실체가 잡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앞의 두 작품이 손에 잡히는 건 아니다. 화자가 설명하는 세 작품에 대한 짤막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세 편의 이야기는 결국 같은 이야기지만, 내 의식 속에서는 그 하나하나가 동일한 사건의 각기 다른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 


세 편의 이야기가 결국 같은 이야기라는 점은 스토리만을 고려하면 아마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리란 생각이다. 드러난 스토리가 아닌 그 스토리가 머금고 있는 주제랄까, 그 이면에 깔린 메시지랄까 하는 것이 같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나로서는 유일한 해결책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정체성'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세 번째 작품 '잠겨 있는 방'에서 '유리의 도시'에 등장했던 스틸먼이나 퀸이 언급되었다고 해서, 또는 퀸이 늘 들고 다녔던 빨간 공책이 등장한다고 해서, 퍼즐 맞추듯 두 작품의 스토리를 연결시켜 보려고 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실 잠시 시도해 본 결과, 드러난 스토리만으로는 말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드러난 스토리나 작품 간 공통적으로 사용된 단어들은 연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안개 같은 모호함을 헤쳐나가는 길은 세 작품의 주인공이 아닌 그들을 창조한 작가 폴 오스터의 의식 세계 안으로 들어가 최대한 유추해 보는 것일 테고, 그렇게 유추하기 위해서는 세 작품의 공통점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은 다분히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단순히 철학과 정신분석학이 아닌 인간의 내면, 본성, 정체성 혹은 존재에 방점이 있을 것이고, 결과가 아닌 과정, 답이 아닌 질문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그래서 결국 묘연한 기분을 떨칠 수는 없겠지만,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바로 그런 것이기에, 즉 미스터리이자 신비이기에, 우리는 이 탐험의 끝에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째 작품 '유령들'의 감상문에서 언급했듯이 '유리의 도시'의 주인공 퀸이나 '유령들'의 주인공 블루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잠겨 있는 방'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화자 (혹시 폴 오스터 아닐까?) 역시 작품 후반부에서 정신분열 증상을 보일 정도로 큰 혼란을 경험한다. 재미있는 점은, 동시에 유의미한 점은 세 작품의 주인공 모두 누군가를 찾거나 쫓아다니다가 ('유리의 도시'에서는 스틸먼을, '유령들'에서는 블랙을, '잠겨 있는 방'에서는 팬쇼를) 그런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쫓다가 결국 자신을 쫓는 것과 같은 결과에 봉착하게 된다고나 할까. 쫓는 사람과 쫓기는 사람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누가 누구를 쫓는지조차 무의미해지게 되는 듯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이 혼란의 정도를 수치화하여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 비교를 위해서 시도해 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보이고, 그렇게 판단한 근거를 설명하다 보면 우린 미스터리의 중심부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유리의 도시'에서 스틸먼을 쫓는 퀸의 혼란을 2로 보자. 그러면 '유령들'에서 블랙을 쫓는 블루의 혼란은 3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잠겨 있는 방'에서 팬쇼를 찾는 화자의 혼란은 5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혼란의 정도가 계속 증가한다. 왜 그런가?


퀸이 스틸먼을 쫓는 이유는 외부에서 주어진 의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의뢰가 잘못 걸려온 전화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 그리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퀸 스스로가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되지 않는 탐정 오스터가 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 의뢰가 현실화되었다는 점은 퀸의 자발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퀸이 스틸먼을 쫓는 건 외부와 내부의 합작인 것이다.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되는 일에 개입한 것이기에 여기서 나는 혼란지수 1점을 부여한다. 또한 스틸먼을 쫓다가 자신의 행동이 무의미하며 나중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외적인 것들 (아파트나 애인 등)을 상실하게 되고, 나아가 내면의 붕괴까지 경험하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도 1점을 부여한다. 합해서 ‘유리의 도시’는 혼란지수 2점이다.


이에 반하여, 블루가 블랙을 감시하는 이유는 화이트라는 의뢰인의 부탁 때문이다. 뜻밖의 반전으로 의뢰인 화이트는 블랙과 동인인물임이 밝혀지고 (여기서 혼란지수 1점), 블루는 자신이 블랙을 감시한다고 여겼지만, 역으로 블랙으로부터 감시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 (여기서도 1점)도 밝혀진다. 타자와 나의 존재는 서로가 존재해야 가능해지므로, 내가 타자를 감시함으로써 비로소 타자의 존재가 입증되는 것이고, 반대로 타자가 나를 감시하기 때문에 나의 존재도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퀸과 마찬가지로 작품 후반부에서 블루 역시 내외면의 붕괴를 겪게 된다. 여기서도 1점이다. 이렇게 ‘유령들’에게는 3점의 혼란지수를 부여한다.


‘잠겨 있는 방’에 나는 가장 큰 혼란지수 5점을 부여했는데 왜 그런가? 먼저 화자가 팬쇼를 찾아 나선 동기와 배경부터 살펴봐야 한다. 어느 날 팬쇼의 아내 소피로부터 편지가 날아든다. 그 편지는 팬쇼의 실종을 알렸고, 실종되었을 시 남편이 부탁한 바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조처였다. 남편이 큰 여행 가방 두 개를 가득 채울 만큼의 작품들이 써진 종이를 화자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그 작품을 출판할지 여부는 화자에게 달려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옆집에 살아 집안끼리도 서로 형제처럼 지낸 옛 친구의 부탁이었고, 한때 화자는 팬쇼를 우상으로 따르기도 하고 한편으론 시기하기도 했었던 만큼 그 부탁은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화자는 꼼꼼히 다 읽어보고 걸작이라는 판단을 내린 후 출판하기로 결정한다. 참고로 화자는 작가다 (내가 화자가 폴 오스터 본인이라고 추측하는 한 가지 이유다). 작품은 대박이 나고, 덕분에 화자는 사 분의 일의 인세를 받게 된다. 그렇다면 이 뜻밖의 횡재는 그에게 축복이었을까? 그는 태어난 지 1년 채 되지 않은 아이를 키우고 있는 팬쇼의 아내 소피에게 마음이 끌리고, 남편이 죽은 거라 판단했던 후였기에 소피는 화자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까지 입양해서 법적인 아버지가 된다. 차츰 화자는 팬쇼의 빈자리를 몽땅 채우게 된 것이었다. 이 빠른 진행과 거짓말처럼 닥쳐온 상황들 속에서 겪었을 혼란에 나는 혼란지수 2점을 부여한다. 변변찮은 작가로 살다가 뜻밖의 기회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서게 된 데서 오는 혼란에 1점, 점점 팬쇼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에 1점, 합쳐서 2점인 것이다. 아직 3점이 남았다. 


본격적인 혼란은 팬쇼의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무렵 편지 한 장이 화자에게 날아들었을 무렵에 시작된다. 수신인불명이었지만, 보낸 이가 팬쇼임이 틀림없는 편지였다. 죽은 줄 알았던 팬쇼는 살아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러나 팬쇼는 아내와 아들마저도 다 그에게 책임져달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자기를 절대 찾지 말라고, 찾으려 하면 죽이겠다고 쓰고 있었다. 어릴 적 시기할 만큼 우상이었던 친구의 작품으로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그의 아름다운 아내와 아들까지도 취하게 되는 화자가 느꼈을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여기서 나는 1점을 더 부여한다. 


팬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혼자만 간직한 채 화자는 팬쇼의 모든 것을 누리기 시작한다. 이전보다 외적으로는 훨씬 나은 삶이 시작되었지만, 화자의 마음속엔 늘 팬쇼가 살아 있다는 사실로 인한 부채감 혹은 죄책감이 동반된 불안이 함께 했을 것이다. 이 새로운 삶이 가져오는 혼란에 1점을 더 부여한다. 


출판사 대표와 대화를 나누다가 팬쇼의 전기를 쓰면 좋겠다는 제안이 나왔고 화자는 승낙하고 만다. 전기를 쓰면 팬쇼를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전기를 쓰려면 인생 전체에 대한 방대한 자료 조사를 해야 하는데 이 과정 중에 화자는 팬쇼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그가 남긴 과거의 흔적들을 좇아 프랑스까지 다녀온다. 그는 전기를 씀으로써 팬쇼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점점 더 팬쇼의 살아 있음을 강렬하게 느끼게 되고 자신이 팬쇼가 되어가는 듯한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술에 취하고 방탕한 삶에 취하기도 하며 그는 자신의 내면의 붕괴를 경험한다. 이 과정의 혼란에도 혼란지수 1점을 부여한다. 이렇게 해서 도합 5점이 된다.


쫓는 사람이 점점 쫓기는 사람과 동일화 과정을 겪게 되는 정도도 ‘유리의 도시’보다 ‘유령들’이, ‘유령들’보다 ‘잠겨 있는 방’이 더 구체적이고 심화되는 듯하다. ‘유리의 도시’에서는 쫓는 사람 퀸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위기를 경험하지만, 쫓기는 사람 스틸먼과 동일시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퀸과 스틸먼은 떨어져 있다. 반면 ‘유령들’에서 쫓는 사람 블루는 쫓기는 사람 블랙 (이기도 하고 화이트이기도 한)과의 거리가 한층 좁혀진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보면 블루는 블랙에게 이용당한 것이지만,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블랙이라는 한 사람의 영향권 아래 종속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작품 ‘잠겨 있는 방’에서 팬쇼를 쫓는 화자는 이미 외적인 부분에서는 팬쇼가 누려 마땅한 것들을 누리게 되었지만, 팬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내면에서는 팬쇼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닌, 즉 외면과 내면이 분리된 삶을 살게 되는 경험을 한다. 쫓는 사람과 쫓기는 사람의 거리가 훨씬 더 가까워져 극심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세 작품 모두 미스터리 같이 모호한 스토리와 주제를 선보이면서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 곧 인간일 것이다. 쫓는 사람이나 쫓기는 사람이나 모두 인간이고, 누군가의 삶에 깊이 개입하게 되면 그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건 타자가 아닌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것. 결국 모든 사람은 인간이라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이어져 있다는 것. 모두가 다르지만 그리 다를 것도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것. 정의 내리기조차 어려운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 미스터리이자 신비로 영원히 남겨둘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면을 정체성 혼란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깊고 풍성하게 생각하게 만들어준 ‘뉴욕 3부작’을 나는 이렇게 마친다.


*폴 오스터 읽기

1.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 https://rtmodel.tistory.com/1788

2. 뉴욕 3부작 중 유령들: https://rtmodel.tistory.com/1791

3. 뉴욕 3부작 중 잠겨 있는 방: https://rtmodel.tistory.com/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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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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