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을
어리석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을 읽고
'가난한 사람들'과 '분신' 사이에 쓰인 이 작품은 별다른 설명 없이 뾰뜨르 이바니치와 이반 뻬뜨로비치 사이에 오고 간 아홉 통의 편지로 구성된 아주 짧은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친했던 두 사람이 불과 며칠 만에 절교에 이르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펼쳐 보인다. 두 사람이 만나 직접 대화를 했더라면 아마도 일이 그렇게 불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지는 직접 대화보다 언어를 걸러서 정갈하게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 반면, 편지를 읽거나 쓸 때만큼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가진다. 아무리 답장이라도 모든 문장에 대해 응답할 수도 없을뿐더러 읽는 이와 쓰는 이의 관점의 차이 때문에 작은 오해가 큰 오해로 쉽게 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한다. 요즈음 시대에 이메일이나 채팅으로도 이러한 오해의 순간들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데, 펜으로 직접 종이 편지를 쓰고 배달하여 빠르면 그다음 날에나 읽어보고 답장을 쓸 수 있었던 19세기엔 그 오해가 얼마나 심각했겠는가. 이 작품에선 뾰뜨르가 다섯 번, 이반이 네 번 편지를 쓰게 된다. 서로가 번갈아 쓴 답장을 가만히 읽고 있노라면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소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서로의 입장만을 변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서로에 대해 내세우는 칼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과정도 볼 수 있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나 같은 경우 두 번 읽어도 가관이었다. 피식 헛웃음이 나올 만큼 말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로 성공한 이후 '분신'의 골랴드낀을 준비하고 있던 도스토옙스키의 모습도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이 작품엔 추가적으로 두 통의 편지가 더 등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발신인을 밝히지 않는데, 거기엔 어떤 의도가 있는 듯싶다. 두 통의 편지는 각자의 아내가 예브게니 니꼴라이치라는 한 남자와 저지른 불륜 혹은 그에 상응하는 행각을 담고 있다. 두 아내가 직접 예브게니에게 과거에 썼던 편지다. 유추해 보건대 뾰뜨르와 이반이 서로의 아내가 저지른 수치스러운 행각의 증거를 몰래 가지고 있다가 서로 절교를 선언하는 동시에 그 증거를 유출한 게 아닌가 싶다. 만약 이 유추가 사실이라면 이 작품은 정말 웃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다가 마지막에 그것을 빈 봉투에 담아 서로에게 가만히 보낸 행위 자체가 갖는 코미디 같으면서도 슬프기도 한 의미 때문이다.
참고로 예브게니는 이반이 뾰뜨르에게 소개해준 청년이다. 그 소개 덕분에 예브게니가 뾰뜨르의 집에 눈치도 없이 너무 오래 거주하는 바람에 뾰뜨르가 이반에게 예브게니를 자기 집에서 나가게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가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추가적인 두 통의 편지의 발신인이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뾰뜨르는 자기 집에 오래 거주하던 예브게니가 자기 아내와 불륜에 빠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이반은 자기 아내가 결혼하기 전 예브게니와 사랑에 빠졌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뾰뜨르와 이반은 애초에 진정 친한 관계였을까? 서로의 흠집이나 잡고 언제나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관계에 지나지 않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이 두 사람 사이에 편지로 오고 간 다툼은 무의미했던 것 같다. 먼저는 두 사람 모두 아무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아내의 행각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한 중간에 낀 예브게니만이 진정한 승자(?)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서로가 잘났다고 적절한 예의를 갖추며 떠들어대던 두 사람은 과연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비단 이 두 사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모두 적용되는, 숨기고 싶은 속성은 아닐까. 불필요한 다툼에 휘말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그리고 이 어리석음은 분열의 전 단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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