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저,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우연이 만든 선물 같은 쉼
김소영 저,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내게 왜 이 책이 굴러들어 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저자의 이름을 착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순간은 삶에서 종종 불가항력적인 반전을 만드는 법. 네 번째 저서가 될 초고를 완성하고 갑자기 찾아든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리던 중 내 눈에 이 책이 잡혔다. 잡히자마자 손에 들려 반나절 만에 다 읽혀버렸다. 이 책은 내면의 거울이 되어 고전 소설을 즐겨 읽게 된 이후 에세이를 상대적으로 멀리 하던 내 모습을 솔직하게 비추었고, 그로 인해 의기소침해진 나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오랫동안 잃어버린 사람처럼 이 책을 흡수했다. 적시에 찾아온 단비 같은 책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좋은 책이란 객관적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주관적인 그날의 기분과 상황, 그리고 개인적인 시간표에 맞춰 읽힌 운명 같은 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덕분에 에세이의 맛을 오랜만에 맛볼 수 있었고, 책장에 꽂힌 여러 에세이집들을 뒤적거리며 주말 오후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겐 선물 같은 책이었다.
저자 김소영은 출판사에서 근무하다가 독서교실을 열어 어린이들과 일상을 함께 하는 작가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의 키워드는 '어린이'다. 이 책은 딱딱한 명사형의 어린이가 아닌, 섬세한 아이와 같은 어른 김소영의 눈과 생각과 마음을 통과한 어린이라는 세계를 차분하게 그려낸다. 저자의 따스한 통찰이 잘 스며든, 어린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세계관을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자니,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내 모습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고, 한때 나도 저렇게 해맑은 어린이였던 적이 있었는데, 하며 작은 한숨을 쉬기도 했다. 나는 잠시 흘러간 시간과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책은 3부로 이뤄진다. 1부 '곁에 있는 어린이', 2부 '어린이와 나', 3부 '세상 속의 어린이'. 2부에선 저자가 어린이였던 시절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독서교실의 어린이들, 그들과 함께 하는 어른 김소영, 그리고 과거 기억 속의 어린이 김소영, 이렇게 시간을 달리 하여 세 존재자가 만들어내는 화음 속에서 저자의 입체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3부에선 저자가 그리는 세상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세상의 부조리와 어른들이 만들어 낸 불의와 거짓으로 물든 사회를 향한 일갈도 들을 수 있다. 어린이라는 단어는 여성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약자를 상징한다. 차별과 혐오와 배제로 얼룩진 세상에서 어린이라는 세계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로부터 어른들이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부와 3부도 좋았지만, 오늘의 나를 터치한 건 1부였다. 1부에서 저자는 독서교실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을 대하는 일상을 소개한다. 어른이 되어버린 저자의 시각과 어린이의 시각이 대조를 이루기도 하면서 묘한 감동을 준다. 어린이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있던 내 고질적인 몇몇 시선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문득 지금은 벌써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아들 녀석이 떠올랐다. 불과 얼마 전 어린이였던 아들을 어떻게 잘 사랑하며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나도 정말 많이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10년, 아니 5년 전에 이 책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이 책이 출간된 해가 2020년인 것을 알고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죄책감을 덜 느껴도 될 것 같아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좋은 아빠, 혹은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현재 어린이를 자녀로 둔 모든 부모들에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작가로서도 나는 이 책을 추천한다. 특히 에세이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일기와 에세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으며, 관찰과 성찰과 통찰에 이르는 글쓰기가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늘 하루 잘 쉬었다. 몸과 마음도 충만하게 쉼을 얻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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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